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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길상호 시인 / 봄비에 젖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9.

길상호 시인 / 봄비에 젖은

 

 

약이다

어여 받아먹어라

봄은

한 방울씩

눈물을 떠먹였지

차갑기도 한 것이

뜨겁기까지 해서

동백꽃 입술은

쉽게 부르텄지

꽃이 흘린 한 모금

덥석 입에 물고

방울새도

삐! 르르르르르

목젖만 굴려댔지

틈새마다

얼음이 풀린 담장처럼

나는 기우뚱

너에게

기대고 싶어졌지

 

 


 

 

길상호 시인 / 비린 별이 떴네

 

 

작은 혀가 웅덩이 물에 닿을 때마다

새끼 고양이는 조금씩 일렁이며 지워졌네

 

물결 속에서 야옹야옹야옹

끝도 없는 흐느낌만 더해가고 있었네

 

마른 탯줄 끝에 묶여 있는 새벽이

냄새를 풍기며 썩어 가는 시장 골목

 

물웅덩이는 생선들의 몸을 씻어내고 태어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비린 무덤

 

죽음으로 내장을 부풀린 새끼 고양이는

몸을 눕힐 구석이나 갖고 있을까

 

묘괴에 홀려 천막을 긁던 바람이

잠시 머물려 젖은 털을 핥아주고 갔네

 

찢어진 차광막 사이로 비늘처럼

생기도 없는 별이 몇 개 떠 있었네

 

 


 

 

길상호 시인 / 심해의 사람

 

 

어떤 빛도 닿을 수 없는

바닥에 내려가 산다 했어요

심장의 열수분화구를 식혀 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요

우울도 지그시 수압으로 눌러놓고

텅 빈 눈의 유령 상어처럼 떠돌다 보면

이따금 내려앉는 기억의 사체들

물컹한 살점이나 뜯으면서

시간의 색깔은 의미가 없다 했어요

그래도 목숨은 즐거움을 원해서

몸을 켰다가 껐다가 발광 놀이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부르는 놀이,

암흑의 바다가 너무 익숙해져서

이젠 뭍으로 돌아갈 수 없다네요

결 고운 바닥에 어서 뼈를 내려놓는 게

지금의 유일한 희망이라 말하는

그는 심해를 사는 사람, 돌아서는 등에

날선 지느러미가 돋아 있었어요

 

 


 

 

길상호 시인 / 연의 귀

 

 

연들이 여린 귀를 내놓는다

그 푸른 귀들을 보고

고요한 수면에

송사리 떼처럼 소리가 몰려든다

 

물 속에 가부좌를 틀고

연들은 부처님같이 귀를 넓히며

한 사발 맛있는 설법을

준비중이다

 

수면처럼 평평한 귀를 달아야

나도 그 밥 한 사발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길상호 시인 / 오동나무 안에 들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으면

낮 동안 바람에 흔들리던 오동나무

잎들이 하나씩 지붕 덮는 소리,

그 소리의 파장에 밀려

나는 서서히 오동나무 안으로 들어간다

평생 깊은 우물을 끌어다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나무

스스로 우물이 되어버린 나무,

이 늦은 가을 새벽에 나는

그 젖은 꿈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잎들은 제 속으로 지며

물결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도 이제 허공을 준비해야지

굳어 버린 네 마음의 심장부

파낼 수 있을 만큼 나이테를 그려 봐

삶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

잔잔한 파장으로 살아가는 우물

너를 살게 하는 우물을 파는 거야

품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몇 개의 잎을 발자국으로 남기고

오동나무 저기 멀리 서 있는 것이다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그 노인이 지은 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와 『모르는 척』(천년의시작, 2007),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사, 2010)가 있음. 2004년 현대시동인상, 천상병 시상, 김달진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