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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영숙 시인 / 물 속의 책 · 2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8.

정영숙 시인 / 물 속의 책 · 2

 

 

  물 밑바닥에 누워 물의 책을 읽는다

 

  두꺼운 몸을 펼쳐 책장마다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는 일

  몸피에 얼룩이 져도 좋으니 나를 흠씬 적시는 일

  기억의 모든 문장, 빨간 펜으로 밑줄 그은 문장들

  흐르는 물에 부풀어 흰 빛으로 터지는 일

 

  누군가 던진 돌멩이의 파문에 책장이 찢어져도

  물의 따스한 입술로 보다듬어 주는 일

  상처난 글자들이 개구리 알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아도

  동글동글한 조약돌이 될 때까지 흐르는 물살에 맡기는 일

 

  잠처럼 푹 젖어 물 바깥 세상 일은 모두 잊는 일

  딱딱하고 삐걱이는 글자들을 잠 밖으로 몰아내고

  떨리던 눈꺼풀, 흰빛으로 터지던 웃음, 벙글던 콧망울

  부드러운 문장들을 풀어 흐르는 물과 한 몸이 되는 일

 

  눈을 뜨면 깊어진 몸을 뚫고 다시 태어나는 말

  부드러운 몸에 가득 담기는 하늘빛 말

  물 속에서 어느 누구도 읽지 않은 내 마음의 새 책을 펼친다

  최초로 쓴, 최초의 문자들이 담긴 물 속의 푸른 책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0월호 발표

 

 


 

정영숙(鄭英淑) 시인

경북 대구에서 출생. 1993년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으로 작품 활동 시작. 그 외 시집으로 『지상의 한 잎 사랑』(문학아카데미, 1995), 『물 속의 사원』(문학아카데미, 1999), 『옹딘느의 집』(포엠토피아, 2001), 『하늘새』(황금알, 2007), 『황금 서랍 읽는 법』(문학세계사, 2012) 등이 있음. 2001년 문예진흥 기금 수혜.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여성문학회 회원, 한국카톨릭문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