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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조 시인 / 사랑한 이야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9.

김남조 시인 / 사랑한 이야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김남조 시인 / 산에 이르러

 

 

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숲과 들판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雲霧)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대죄(待罪)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地下)의 돌들과 뿌리들이

이 분으로 하여 강녕(康寧)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이 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오늘 새삼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에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해주시는가

 

 


 

 

김남조 시인 / 산에게 나무에게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왔네

그들은 주인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김남조 시인 / 상심수첩

 

 

1

먼 바다로

떠나는 마음 알겠다

깊은 산 깊은 고을

홀로 찾아드는 이의 마음 알겠다

사람세상 소식 들으려

그 먼길 되짚어

다시 오는 그 마음도 알겠다

 

2

울며 난타하며

종을 치는 사람아

종소리 맑디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천 몇만 번을

사람이 울고

종도 소리 질러야 하는가

 

3

층계를 올라간다

한없이 올라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층계를 내겨간다

한없이 내려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이로써 깨닫노니

층계의 위 아래는

같은 것이구나

 

4

병이 손님인양 왔다

오랜만이라며 들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커다란 책을 펴들고 그 안에 쓰인 글시,

세상의 물정들을 보여준다

한 모금씩 마시는 얼음냉수처럼

천천히 추위를 되뇌이며 구경한다

눈물 흐르는 일이 묘하게 감미롭다

 

5

굶주린 자 밥의 참뜻을 알듯이

잃은 자 잃은 것의 존귀함을 안다

신산에서 뽑아내는

꿀의 음미를.

이별이여

남은 진실 그 모두를

바다 깊이 가라앉히는 일이여

 

6

기도란

사람의 진실 하늘에 바침이요

저희의 진실 오늘은 어둠이니

이 어둠 바치나이다

 

은총은

하늘의 것을 사람에게 주심이니

하늘나라 넘치는 것

오늘 혹시 어둠이시면

어둠 더욱 내려주소서

 

7

전신이 감전대인 여자

바람에서도 공기에서도

전류 흘러 못견디는 여자

겨울벌판에서도 허공에서도

와아와아 몸서리치며 다가오는

포옹의 팔들. 팔들

 

8

그를 잃게 된다

누구도 못바꿀 순서란다

다른 일은 붙박이로 서 있고

이 일만 바람갈기 날리며 온다

저만치에,

바로 눈 앞에.

지금,

아아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9

제 기도를 진흙에 버리신 일

용서해 드립니다

그간에 주신 모든 용서를 감사드리며

황송하오나 오늘은 제가

신이신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아아 잘못하실 수가 없는 분의 잘못

죄의 반란 같은 것이여

 

전심전령이 기도 헛되어

하늘은 닫히고

사람은 이런 때 울지 않는다

 

10

아슴한 옛날부터

줄곧 걸어와

마침내 오늘 여기 닿았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더는 아무 일도 생기잖을

마지막 땅에

즉 온전한 목마름에

 

 


 

 

김남조 시인 / 새

 

 

새는 가련함 아니여도

새는 찬란한 깃털 어니여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여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여도

 

탱크만치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 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면

이로써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김남조(金南祚, 1927.9.26~ ) 시인

1927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1953년 첫 시집 《목숨》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겨울 바다』, 『설일』, 『사랑 초서』, 『동행』, 『김대건 신부』, 『빛과 고요』, 『바람 세례』, 『평안을 위하여』, 『희망 학습』 등과 수상집 및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외 다수가 있음. 자유문인협회상(1958), 오월문예상(1963), 시인협회상(1974), 국민훈장 모란장(1993년),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은관문화훈장(1998), 만해대상(2007) 등을 수상.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역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