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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 가을바람
가을바람은 그냥 스쳐가지 않는다 밤 별들을 못 견디게 빛나게 하고 가난한 연인들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헤매는 거리의 비명과 한숨을 몰고 와 어느 썰렁한 자취방에 슬며시 내려앉는다
그리고 생각나게 한다 지난 여름을, 덧없이 보낸 밤들을 못 한 말들과 망설였던 이유들을 성은 없고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낡은 앨범 먼지를 헤치고 까마득한 사연들이 튀어나온다
가을바람 소리는 속절없는 세월에 감금된 이의 벗이 되었다, 연인이 되었다 안주가 되었다
가을바람은 재난이다
최영미 시인 /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최영미 시인 / 겨울의 문
고장 난 생의 시계가 움직이고 사랑이 눈처럼 쏟아지는 오후
멈춰 선 바퀴, 유리문 안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아련한 청춘을 더듬으며 삼 십 년의 세월을 지워나갔다 뜨거운 입김에 가려 바깥세상이 까맣게 멀어지고
하얀 눈 위에 떨어진 가녀린 낙엽 거울에 새겨진 서러운 입술 자국들
최영미 시인 /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시인 / 그대에게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 거야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오늘은 그대가 내일의 당신보다 가까울지 비평가도 모를 거야 그리고 아마 너도 모를 거야 내가 너만 좋아 했는 줄 아니? 사랑은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때때로 보통으로 바람 피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모를 거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습관도 뭣도 아니라는 걸 속아도 크게 속아야 얻는 게 있지 내가 계속 너만을 목매고 있다고 생각하렴 사진처럼 안전하게 붙어 있다고 믿으렴 어디 기분만 좋겠니? 힘도 날거야 다른 여자 열 명은 더 속일 힘이 솟을 거야 하늘이라도 넘어갈거야 그런데 그런데 연애시는 못 쓸걸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두드려패는 법은 모를걸 아프더라도 스스로 사기칠 힘은 없을걸,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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