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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 가난한 사람에게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밖에 걸어 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호승 시인 / 가을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정호승 시인 / 가을 꽃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 꽃이여
정호승 시인 / 결혼에 대하여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국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깍아 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정호승 시인 / 그는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움녕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 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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