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조 시인 / 소녀를 위하여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김남조 시인 / 슬픔에게
정적에도 자물쇠가 있는가 문 닫고 장막 드리우니 잘은 모르는 관 속의 고요로구나
밤에서 밤으로 어둠에 어둠 겹치는 유별난 시공을 너에게 요람으로 주노니 느릿느릿 흔들리면서 모쪼록 소리내진 말아라
오히려 백옥의 살결 따스해서 눈물나는 아기나 하나 낳으려무나 소리 없이 반짝이는 눈물 빛 사리라도 맺으려무나
나의 슬픔이여
김남조 시인 / 시인(詩人)
1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2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明燈(명등)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3 진정한 玉(옥)과 같은 진정한 詩人(시인) 우리시대 이 목마름
4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靜菽(정숙)에 첫 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김남조 시인 / 시인에게
그대의 시집 옆에 나의 시집을 나란히 둔다 사람은 저마다 바다 가운데 섬과 같다는데 우리의 책은 어떤 외로움일는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와 보는가 우리는 그 바람을 알아보는가 시인이여 모든 존재엔 오지와 심연, 피안까지 있으므로 그 불가사의에 지쳐 평생의 시업이 겁먹는 일로 고작이다
나의 시를 읽어 다오 미혹과 고백의 골은 깊고 애환 낱낱이 선명하다 물론 첫새벽 기도처럼 그대의 시를 읽으리라 다함 없이 축원을 비쳐 주리라
시인이여 우리는 저마다 운명적인 시우를 만나야 한다 서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도 진맥하여 피와 이슬을 마시게 할 그 경건한 의사가 시인들말고 다른 누구이겠는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뭉쳐 폭발하는 이 물량의 시대에 유일한 결핍 하나뿐인 겸손은
마음에 눈 내리는 추위 그리고 이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 앞에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죄인이다
시인이여 막막하고 쓸쓸하여 오늘 나의 작은 배가 그대의 섬에 기항한다
김남조 시인 / 심장이 아프다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호승 시인 / 내 마음속의 마음이 외 4편 (0) | 2020.08.21 |
|---|---|
| 최영미 시인 / 내 마음의 지중해 외 4편 (0) | 2020.08.21 |
| 장이엽 시인 / 생략법(省略法) (0) | 2020.08.20 |
| 김사람 시인 / 이것이 시다 (0) | 2020.08.20 |
| 방수진 시인 / 패스포트 3 (0) | 2020.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