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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 내 마음의 지중해
갈매기 울음만 비듬처럼 흐드득 듣는 해안
바람도 없고 파도도 일지 않는다
상한 몸뚱이 끌어안고 물결만 아프게 부서지는
지중해, 내 마음의 호수 너를 향한 그리움에 갇혀 넘쳐도 흐르지 못하는 불구(不具)의 바다.
그 단단한 고요 찾아 나, 여기 섰다 내 피곤한 이마를 잠시 데웠다 떠나는 정오의 햇살처럼 자욱이 피어올라 한점 미련 없이 사라지는 물안개처럼 흔적 없이 널 보낼 수 있을까
최영미 시인 / 내 속의 가을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가∼을
최영미 시인 / 내 편지는 지금 가고 있는 중
불륜은 아름답다고 불륜은 추하다고 카운터의 아가씨들은 저희끼리 돌아앉아 화장을 고치고 수다와 수다 사이 비가 내린다 노래는 흐른다 아, 시간아 멈춰다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에게로 가는 편지가 되돌아오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서교동 Cafe´Havana에서 오늘도 커피잔을 깨뜨리며 오후의 정사처럼 부스스한 추억을 꿰맞추는 밤 창밖에선 허술한 어깨들이 서로 젖지 않으려 어깨를 비비고 우산 하나로 세상의 비를 다 막겠다는 것인지 멀리서 비에 젖는 어느 영혼을 위하여 빌고 싶은 밤 취한 건, 추한 건, 불륜만이 아니었다.
최영미 시인 /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 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부치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최영미 시인 / 마지막
산을 보았고 바다를 보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집 고대 왕국의 폐헤도 보았다
깨어진 기왓장에 새겨진 장인의 손바닥 거짓을 모르는 아이의 얼굴 어미의 누가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 팔다리가 마비된 아버지의 치부도 보았다 내 입술과 겹쳐졌던 입술들도 보였고 떠나간 친구의 뒷모습도 보였다
열차는 종착점에 가까워지는데 너의 어깨는 보이지 않았지 나를 매장할 손은 떠오르지 않았지
눈을 감고 산을 넙고 강을 건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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