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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라라 시인 / 저 구석의 가방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1.

최라라 시인 / 저 구석의 가방

 

 

  나는 저 가방에게

  웅크리고 있다 해야 할 지

  벼르고 있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필요할 때만 전화하는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지만

  포용에 관한 한 가방만큼 쉬워진다면

  세상은 자주 비상 전력 없이 정전된 도시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어쩌다 내가 가방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

  나를 빈틈없이 꺼주기 때문이란 변명은 변명일 뿐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벼르기도 했다

  마침내 집을 완성한 고치의 순간처럼

  결연하지만 외로운 것의 하나로

  툭 떨어져 웅크렸던

  어떤 날, 외로움의 끝은 볼펜이나 종이의 끝과 닿아 있었다

  내가 봄이라 적어보는 사이

  누군가의 외로움이 왔다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아직 내가 잠에서 깰 생각이 없었으므로

  누군가는 잠들 수 없는 날이었다

  그 때 내 밖의 순간은 내가 아니었듯

  포용에 관한 한 가방의 의지가 아니므로

  가방의 한 계절은 나방의 한 계절보다

  짧고 위태로울 수 있지만

  웅크리거나

  벼르거나

  저 가방의 예정된 구석이라 할 수밖에,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0월호 발표

 

 


 

최라라 시인

1969년 경주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1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