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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내 마음속의 마음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1.

정호승 시인 / 내 마음속의 마음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내 목을 베어 가십시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베어낸 내 목을

평생토록 베개로 삼아주십시오

그래도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시 칼로 베개를 내려쳐주십시오.

눈 내리는 그믐날 밤

기차역 부근에서

내 마음속의 마음이 말했습니다.

 

 


 

 

정호승 시인 /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 내린다.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 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 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정호승 시인 / 너에게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정호승 시인 / 눈부처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저무는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인생의 눈부처 되리

내 죽을 때 망초 꽃 되어

그대 맑은 눈동자 눈부처 되리..

 

 


 

 

정호승 시인 / 등신불

 

 

강물도 없이 강이 흐르네

하늘도 없이 눈이 내리네

사랑도 없이 나는 살았네

 

모래를 삶아 밥을 해먹고

모래를 짜서 물을 마셨네

 

잘 가게

뒤돌아보지 말게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네

 

눈이 오는 날

가끔 들르게

 

바람도 무덤이 없고

꽃들도 무덤이 없네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