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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조 시인 / 은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4.

김남조 시인 / 은혜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주시던 날

 

그날 하루의

은혜를

나무로 심어 숲을 이루었니라

물로 키워 샘을 이루었니라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그리움이게 하신

그 뜻을 소중히

외롬마저 두 손으로 받았니라

 

가는 날 오는 날에

눈길 비추는

달과 달무리처럼 있는 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너를 남겨 주실 어느 훗날

숨 거두는 자리

감사함으로

두 영혼을 건지면

다시 은혜이리

 

 


 

 

김남조 시인 / 의자

 

 

세상에 수많은 사람 살고

사람 하나에 한 운명 있듯이

바람도 여러 바람

그 하나마다

생애의 파란만장

운명의 진술서가 다를 테지

하여 태초에서 오늘까지 불어 와

 

문득 내 앞에서

나래 접는 바람도 있으리라

그를 벗하여

나도 더 가지 않으련다

 

삶이란 길가는 일 아니던가

모든 날에 길을 걷고

한 평생 걸어 예 왔으되

이제 나에게

삶이란

 

도착하여 의자에 앉고 싶은 것

겨우겨우 할 일 끝내고

내명 얻으려 좌선에 든

바람도사 옆에서

예순 해 걸어온 나는

예순 해 앉아 있고 싶노니

 

 


 

 

김남조 시인 / 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 테니까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김남조 시인 / 인인(隣人)

 

 

보이지 않는 고운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보이지 않게 곱고 괴로운 영혼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그것은

인기척없는 외딴 산마루에

풀잎을 비비적거리며 드러누운

나무의 그림자 모양

쓸쓸한 영혼

쓸쓸하고 서로 닮은

영혼이었느니라

 

집 가족 고향이 다르고

가는 길 오는 길 있는 곳이 어긋난도

한바다 첩첩이 포개진 물 밑에

청옥빛 파르름한 조약돌이

가지런히 둥그랗게

눈뜨고 살아옴과 같았느니라

 

영혼이 살고 잇는 영혼들이 마을에선

살경이 부딪는 알뜰한 인인

우리는 눈물겹게 함께 있어 왔느니라

 

짐짓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손짓으로

철따라 부르는 소리였느니라

철 따라 대답하는

마음이었느니라

 

 


 

 

김남조 시인 / 장엄한 숲

 

 

삼천 년 된 거목들의 숲은

겨우내 끝이 안 보이는 설원(雪原)

나무들은

그 눈 벌에 서 있습니다

 

어느 겨울

그 중의 한 나무가

눈사태에 떠밀려 쓰러질 때

하느님이

품 속에 안으셨습니다

나직이 이르시되

아기야 쉬어라 쉬어라 ……

 

하느님께선

이 나무가 작은 씨앗이던 때를

기억하시며

거대한 뿌리에서 퍼져나간

젊은 분신들도 알으십니다.

 

쉬어라 쉬어라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날

자애로운 안도(安堵)이셨습니다

가령에

삼천 년을 노래해온 새가 있다면

쉬어라 쉬어라고 하실 겝니다

이 나무 기나긴 삼천 년을

장하게 맥박쳐 왔으니까요

 

레드우드 품종의

그 이름 와워나로 불리우는

이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수면이요 안식이며

이후 삼천 년 동안

그는 잠자는 성자일 겝니다

 

장엄한 숲에서

이 겨울도

끝이 안 보이는 아득한 설원에서

 

 


 

김남조(金南祚, 1927.9.26~ ) 시인

1927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1953년 첫 시집 《목숨》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겨울 바다』, 『설일』, 『사랑 초서』, 『동행』, 『김대건 신부』, 『빛과 고요』, 『바람 세례』, 『평안을 위하여』, 『희망 학습』 등과 수상집 및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외 다수가 있음. 자유문인협회상(1958), 오월문예상(1963), 시인협회상(1974), 국민훈장 모란장(1993년),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은관문화훈장(1998), 만해대상(2007) 등을 수상.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역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