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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 옛날의 불꽃
잠시 훔쳐온 불꽃이지만 그 온기를 쬐고 있는 동안만은 세상 시름, 두려움도 잊고 따뜻했었다
고맙다 네가 내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최영미 시인 / 월동준비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는 도시의 불빛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 인간이 지겨우면서 그리운 밤
애인을 잡지 못한 늙은 처녀들이 미장원에 앉아 머리를 태운다 지독한 약품냄새를 맡으며 점화되지 못한 욕망
올해도 그냥 지나가는구나 내 머리에 손댄 남자는 없었어 남자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머리를 매만지며 안개처럼 번지는 수다…… 겨울을 견딜 스타일을 완성하고 거울을 본다.
머리를 자르는 것도 하나의 혁명이던 때가 있었다. 생머리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표식이던, 단순한 시대가……
최영미 시인 / 한국의 정치인
대학은 그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기업은 그들에게 후원금을 내고 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병원은 그들에게 입원실을 제공하고 비서들이 약속을 잡아주고 운전수가 문을 열어주고 보좌관들이 연설문을 써주고 말하기 곤란하면 대변인이 대신 말해주고 미용사가 머리를 만져주고 집 안 청소나 설거지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도대체 이 인간들은 혼자 하는 일이 뭐지?"
최영미 시인 /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 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최영미 시인 /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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