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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 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 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면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정호승 시인 / 소록도에서 온 편지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 개동백나무에 개동백이 피고 바다 위로 보르말이 떠오르는 밤 손 없는 손으로 동백꽃잎마다 주워 한 잎 두 잎 바다에 띄우나니 받으시라 팔 없는 팔로 허리를 두르고 발 없는 발로 함께 걷던 바닷가를 동백꽃잎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시라
정호승 시인 /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 길을 걸어갈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정호승 시인 / 술 한 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가을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르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 시인 / 시인예수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는 새벽의 사람 해 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고요한 기다림의 아들.
절벽 위에 길을 내어 길을 걸으면 그는 언제나 길 위의 길 절벽의 길 끝까지 불어오는 사람의 바람.
들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용서하는 들녘의 노을 끝 사람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와하는 아름다움의 길이.
날마다 사랑의 바닷가를 거닐며 절망의 물고기를 잡아 먹는 그는 이 세상 햇빛이 굳어지기 전에 홀로 켠 인간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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