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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인 시인 / 가을 산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4.

김명인 시인 / 가을 산

 

 

마침내 이루지 못한 꿈은 무엇인가

불붙는 가을 산

저무는 나무등걸에 기대서면

내 사람아, 때로는 사슬이 되던 젊은 날의 사랑도

눈물에 스척이는 몇 장 채색의 낙엽들

더불어 살아갈 것 이제 하나 둘씩 사라진 뒤에

여름날의 배반은 새삼 가슴 아플까

저토록 많은 그리움으로 쫓기듯

비워지는 노을, 구름도 가고

이 한때의 광휘 마저 서둘러 바람이 지우면

어디로 가고 있나

제 길에서 멀어진 철새 한 마리

울음소리 허전하게 산자락에 잠긴다

 

 


 

 

김명인 시인 / 가을의 끝

 

 

더 이상 시들 것 없는 벌판 속으로

바람이 몰려 간다 풍찬노숙의

쓸쓸한 풀꽃 몇 포기 아직도 지지 못해서

허옇게 갈대꽃 함께 흔들리는 강가

오늘은 우주의 끝으로

귀뚜르르 귀뚜라미 교신하는 가을의 끝머리에 선다

또 우리가 누릴 수 없어도 날들은 이렇게

흘러가고 흘러가리라

이마에 물결치는 강굽이 바라보며 눈썹 젖으면

캄캄했던 세월만 저희끼리

추억이 되고 아픔이 되고 한다

그러므로 소리 죽여 흐느끼는 여울이여

억새 가슴에 저며 서걱이는 빈 들판에 서서

이제 우리가 새삼 불러야 할 노래는 무엇인가

저기 위안 없이 가야 할

남은 길들이 마저 보인다

그러니 여기 잠시만 멈춰 서라

 

 


 

 

김명인 시인 / 각별한 사람

 

 

그가 묻는다,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언제쯤 박음질된 안면일까, 희미하던 눈코입이

실밥처럼 매만져진다

무심코 넘겨 버린 무수한 현재들, 그 갈피에

그가 접혀 있다 해도

생생한 건 엎질러 놓은 숙맥(菽麥)이다

중심에서 기슭으로 번져 가는 어느 주름에

저 사람은 나를 접었을까?

떠오르지 않아서 밋밋한 얼굴로

곰곰이 각별해지는 한 사람이 앞에 서 있다

 

 


 

 

김명인 시인 / 고랑

 

 

통발을 심으러 가는지

작은 어선 한 척 파도가 들썩일 때마다

이물을 한껏 높였다가 물이랑 속으로 구겨박는다

 

하루 종일 마늘쪽 놓느라

늦가을 햇살 수그린 줄도 모르고

바다로 쏠리는 비탈 밭고랑에서

이따금씩 고개 내미는 저 할매

파도 기슭이라 파뿌리마저 다 심어버렸나

 

뭍에서 보면 수평선은 한 줄 긴 금이지만

수만 고랑을 겹친 그 너머의 땅 분명히 있다

끝내 너울을 타고 넘어가는 저 할매처럼 노을처럼

처녀비행에 나서는 어떤 새들이 빠져 죽기도 하는 곳

 

배를 몰고 섬 사이를 지나갈 때 어디서 흘러오는 수수께끼인가

물이랑 흔드는 흰 부표들

빈 병처럼 넘실대지만

통발 담아 내린 자리를 표시하지만

 

모든 무덤들도 부표를 띄워

거기가 파도 고랑임을 일러준다

 

 


 

김명인(金明仁, 1946~ ) 시인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 경기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 1973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출항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73』 동인을 거친 그는 김창완 · 이동순 · 정호승 등과 함께 『반시』 동인에 참여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임. 그는 이제까지 『동두천』(1979) · 『머나먼 곳 스와니』(1988) · 『물 건너는 사람』(1992) ·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 · 『바닷가의 장례』(1996) · 『길의 침묵』(1999) 등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