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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인 / 가을 산
마침내 이루지 못한 꿈은 무엇인가 불붙는 가을 산 저무는 나무등걸에 기대서면 내 사람아, 때로는 사슬이 되던 젊은 날의 사랑도 눈물에 스척이는 몇 장 채색의 낙엽들 더불어 살아갈 것 이제 하나 둘씩 사라진 뒤에 여름날의 배반은 새삼 가슴 아플까 저토록 많은 그리움으로 쫓기듯 비워지는 노을, 구름도 가고 이 한때의 광휘 마저 서둘러 바람이 지우면 어디로 가고 있나 제 길에서 멀어진 철새 한 마리 울음소리 허전하게 산자락에 잠긴다
김명인 시인 / 가을의 끝
더 이상 시들 것 없는 벌판 속으로 바람이 몰려 간다 풍찬노숙의 쓸쓸한 풀꽃 몇 포기 아직도 지지 못해서 허옇게 갈대꽃 함께 흔들리는 강가 오늘은 우주의 끝으로 귀뚜르르 귀뚜라미 교신하는 가을의 끝머리에 선다 또 우리가 누릴 수 없어도 날들은 이렇게 흘러가고 흘러가리라 이마에 물결치는 강굽이 바라보며 눈썹 젖으면 캄캄했던 세월만 저희끼리 추억이 되고 아픔이 되고 한다 그러므로 소리 죽여 흐느끼는 여울이여 억새 가슴에 저며 서걱이는 빈 들판에 서서 이제 우리가 새삼 불러야 할 노래는 무엇인가 저기 위안 없이 가야 할 남은 길들이 마저 보인다 그러니 여기 잠시만 멈춰 서라
김명인 시인 / 각별한 사람
그가 묻는다,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언제쯤 박음질된 안면일까, 희미하던 눈코입이 실밥처럼 매만져진다 무심코 넘겨 버린 무수한 현재들, 그 갈피에 그가 접혀 있다 해도 생생한 건 엎질러 놓은 숙맥(菽麥)이다 중심에서 기슭으로 번져 가는 어느 주름에 저 사람은 나를 접었을까? 떠오르지 않아서 밋밋한 얼굴로 곰곰이 각별해지는 한 사람이 앞에 서 있다
김명인 시인 / 고랑
통발을 심으러 가는지 작은 어선 한 척 파도가 들썩일 때마다 이물을 한껏 높였다가 물이랑 속으로 구겨박는다
하루 종일 마늘쪽 놓느라 늦가을 햇살 수그린 줄도 모르고 바다로 쏠리는 비탈 밭고랑에서 이따금씩 고개 내미는 저 할매 파도 기슭이라 파뿌리마저 다 심어버렸나
뭍에서 보면 수평선은 한 줄 긴 금이지만 수만 고랑을 겹친 그 너머의 땅 분명히 있다 끝내 너울을 타고 넘어가는 저 할매처럼 노을처럼 처녀비행에 나서는 어떤 새들이 빠져 죽기도 하는 곳
배를 몰고 섬 사이를 지나갈 때 어디서 흘러오는 수수께끼인가 물이랑 흔드는 흰 부표들 빈 병처럼 넘실대지만 통발 담아 내린 자리를 표시하지만
모든 무덤들도 부표를 띄워 거기가 파도 고랑임을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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