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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인 / 불안새
여기까지 날아와 날개를 접는 큰 새를 바라보는데 꿈밖의 일인 것처럼 두리번거렸으니 세 개의 사막을 건너는 대상 속에 섞인 듯 내 잠은 여행자의 악몽 같은 것 먼 고장에서 오는 듯 어리둥절한 이 봄에는 아직도 맹렬한 냉기가 묻어 있으니 이 불안 어디서 오나, 무심코 바라보는 꽃잎이 계절을 일깨우듯 예감은 한 소절의 노랫말처럼 머릿속을 적신다 산책길에 개를 앞세우고 천천히 뒤따르며 누군가의 충고를 고삐삼아 생각을 조율하지만 지키려는 허공이 너무 넓어서 떠도는 구름들은 돌아보고 돌아본다 멀리 떠난 것 같지만 늘 머리 위에서 맴도는 이상한 새의 날갯짓 아래 시들시들 피는 듯 마는 듯 봄꽃들이 지고 있다 귀도 코도 아주 뭉개진 복면들이 복병처럼 출몰해서 느닷없이 가는 곳을 캐묻곤 한다
김명인 시인 / 빨래
골목에 내걸렸던 弔燈 거두어졌다 소문난 악상처럼 며칠째 울음을 깔아놓던 장맛비도 물러가고 오늘은 날빛 환하게 초여름의 생기가 진동하여 관악 한 자락 성큼 눈앞까지 밀려든다 앞집 옥상에 널린 빨래 눈부시게 희다 상복일까, 亡者가 걸쳤던 옷가질까 누군가 살고 죽는 일로 저토록 선명하게 한세상 표백할 수 있다면 지상의 남루 따위야 누더기로 걸친들 벗어버려서 한없이 홀가분한 허물인 것을 팔이 빠져나간 빈 소매를 바람이 부여잡고 힘차게 흔들어댄다 깃발의 영혼 거기 들어가 허공을 꿰차는지 활옷 한 자락 잔뜩 부푼 채 오래오래 펄럭이고 있다
김명인 시인 / 세월에게
내 늑골의 골짜기마다 핏빛 절이며 세월이여 비 그치니 지금 눈부시게 불타는 계절은 가을 대지의 신열은 가라앉고 생식과 치욕조차 시들어 시월의 잎들과 11월의 빈가지 사이 걸어갈 작은 길 하나 걸쳐져 있다 잿빛 날개 펼치고 저기 새 한 마리 숱한 사연과 사연도 저희끼리 공중제비로 흩어 구름 훌러 간다 목놓아 우는 것이 어디 여울뿐이랴 둔덕의 갈댓머리 하얗게 목이 쉬어도 그리움의 노래 대답 없으니 마침내 위안 없이 걸어야 할 남은 시간이 마저 보인다
김명인 시인 / 죽은 공장
십몇 년 탈 없이 돌아가던 공장이 문을 닫았다. 주문도 기계음도 멈춰선 벨트 위엔 난삽하게 어질러진 먼지의 잔업들 흐릿해진 공장의 눈에 무엇이 비치는 걸까?
다가서면 하오의 생계로 스산한 햇살 잦아드는 손바닥만 한 마당에서 아이 몇 추위에 떨면서 놀고 있다. 해 질 녘까지 눌러놓은 허기 아래 어른어른 실직인 하루 하루가 비치다 마다한다.
목줄에 함께 묶였던 너는 각별한 이웃, 아침저녁 밖으로 끌고 나가야 용변을 보던 개처럼 업보인 양 여겨지던 한때의 일과들, 구난 길에서 돌아와 잠긴 문 앞에 서면 죽은 공장이 옛 동료를 알아보고 컹컹 짖어댄다.
김명인 시인 / 천지간
저녁이 와서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놓는 일 그걸 가두려고 이튿날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여름밤은 너무 짧아 수평선 채 잠그지 못해 두 사내가 빠져나와 한밤의 모래톱에 마주앉았다 이봐,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어 부려놓으면 바다가 다 메워질 거야 그럴 테지, 천지를 빼곡히 채운 이 어둠 좀 보아 막막해서 도무지 끝 간 데를 몰라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겹쳐 밤새도록 철썩거리며 파도가 오고 그래서 망연茫然한 여름밤은 더욱 짧다 어느새 아침 해가 솟아 두 사람을 해안선 이쪽저쪽으로 갈라놓는다 그 경계인 듯 파도가 다시 하루를 구기며 허옇게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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