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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가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6.

김지하 시인 / 가을

 

 

낙엽철

햇빛 속에서

 

머리를 긁어 올린다

흰 비듬이

우수수 쏟아진다

 

가슴에 꽂힌

모진 눈빛들 칼끝 같은 말들

다 쏟아진다

 

푸른 하늘

 

제주 어디쯤

검은 돌 틈 흰 갈꽃에 가 있는

내 마음 그물 새

 

가을.

 

 


 

 

김지하 시인 / 갈꽃

 

 

싸늘한 듯 살가운

가을 풀 냄새

이리

돌아오는 옛 마을

 

코끝에

또 가슴속에

갈꽃 하나 흔들려

 

지금

거리에서 버티고

모멸에도 미소짓고

 

술 취한 밤

파김치 발길이

집 찾아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은

 

갈꽃 하나

내 아내

 

마음의

 

이 가을

숨쉬는 일 모두 다

 

아아 귀향!

 

 


 

 

김지하 시인 / 길

 

 

걷기가 불편하다

가야하고 또 걸어야 하는 이곳

미루어 주고 싶다.

다하지 못한 그리움과

끝내지 못한 슬픈 노래를

허나

길은 걸어야 하고 생각은

가야 하나 보다.

 

눈물이 흐른다.

보내야 하고 잊어야 하는 이곳

눈 있어 보지 못한 너와

입 있어 말 못하는 내가

 

허나

길은 걸어야 하고

생각은 가야 하나 보다.

 

 


 

 

김지하 시인 / 꽃 그늘

 

 

이제야 그늘 속에

 

핀다

 

꽃과 그늘 사이

언젯적부터인가

그 긴장은

 

이제야

짧은 행간에

웬 무늬무늬 드러나

흰 무늬들

속의 속

흐드러진다

 

내 삶의

 

여기

청도 각북골에 와

엎드린 한 새벽에 흘러

흘러 넘치며 아롱거리는

샘물 속

 

 


 

 

김지하 시인 / 끝

 

 

기다림밖엔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끝없는 끝들이여

말없는 가없는 모습도 없는

수렁 깊이 두 발을 묻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외쳐 부르는 이 기나긴 소리의 끝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죽기 전엔 디뎌보마

죽기 전엔

 

꿈없는 네 하얀 살결에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

바람도 소리도 빛도 없는 세월이여 기다림밖엔

남김 없는 죽음이 죽음에서 일어서는

외침의 칼날을 기다림밖엔

끝없는 끝들이여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죽기 전엔 기어이

결별의 글 한 줄은 써두고 가마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