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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 / 가을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마종기 시인 / 갈대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마종기 시인 / 겨울 기도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마종기 시인 / 겨울 묘지
피붙이의 황량한 묘지 앞에 서면 생시의 모습이 춥고 애잔해서 눈 오시는 날에도 가슴 미어지는구나.
살고 죽는 것이 날아가는 바람 같아 우리가 서로 섞여서 어디로 간다지만 그 어려운 계산이 모두 눈이 되어 내려서 오늘은 긴 눈발 속에 아무도 보이지 않네.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까 두 손에 눈을 받아도 소식 한 장 어느새 눈물 방울로 변하고 귀에 익은 침묵만 세상의 주위를 적시네.
내 눈이 공연히 시려오는 잿빛 하늘 눈이 와서 또 쌓여서 비석까지 덮는다. 움직이는 슬픔이 움직이지 못하는 슬픔을 만나 깨끗한 무게로 서로를 달래주는구나.
그렇다. 우리는 도저히 헤어지지 않는다. 네 숨결은 묘지 근처의 맑고 찬 공기, 하늘이 더 낮게 내려와 우리는 손을 잡는다. 어느새 눈이 그치고 바람이 자고 우리가,
마종기 시인 / 겨울기도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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