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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무(無)
공허하므로 움직인다
시장해서 나 너를 사랑했노라
땅 위의 풀과 벌레 거리의 이웃들 해와 달별과 구름 모두 다 모두 다 죽어 가는 이 한낮
내 속에 텅 빈속에 바람처럼 움트는 왠 첫사랑 우주 사랑
그 새붉음을 본다
공허하므로 공허함으로 움직인다.
김지하 시인 / 백학봉(白鶴峰)
멀리서 보는 백학봉白鶴峰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지선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 자락이 펄럭,
아 이제야 알겠구나 흰 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김지하 시인 / 별
내일 새벽 나의 죽음 뒤에 아마도 별이 뜰 것이다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 뜰 것이다
우주의 비밀이다 살아서는 내 몸 속에 빛나던, 아름답던,
나를 이제껏 살게 했던
그 별이 처음으로 우주에 뜰 것이다 숨어 있던 별,
아마도 내일 새벽 나의 죽음 위에 비밀을 열 것이다
다시 산다면 나는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로
항상 떠 내내 비췰 것이다.
김지하 시인 /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아직은 따스한 토담에 기대 모두 토해버리고 울다 일어나 무너진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무것도 없는 댓잎 하나 쓰적일 바람도 없는 이렇게 비어 있고 이렇게 메말라 있고 미칠 것만 같은 미칠 것만 같은 서로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 불 켠 방의 초라한 술자리 초라한 벗들
날이 새면 너는 진부령 넘어 강릉으로 오징어잡이, 나는 또 몸을 피해 광산으로 가야 할 마지막 저 술자리
서로 싸우지 않고는 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낯선 마을의 캄캄한 이 시대의 한 밤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아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김지하 시인 / 빗소리
눈감고 빗소리 듣네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돌아 다시 하늘로 비 솟는 소리 듣네
귀 열리어 삼라만상 숨쉬는 소리 듣네
추위를 끌고 오는 초겨울의 저 비 산성비에 시드는 먼 숲속 나무들 저 한숨 소리
내 마음속 파초잎에 귀 열리어
모든 생명들 신음 소리 듣네 신음 소리들 모여 하늘로 비 솟는 소리 굿치는 소리 영산 소리 듣네
사람아 사람아 외쳐 부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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