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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미화 시인 / 적소(謫所)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7.

이미화 시인 / 적소(謫所)

 

 

  나는 적소를 흘러 다녔다.

 

  꿈 바깥으로 뱉어낸 말에 잠이 깬 새벽

  어디를 흘러 다녔을까 적소는

  사전에 소엽(赤蘇)이거나 적굴(賊窟)이거나 꼭 알맞은 자리이거나 귀양지라는데

  페름기의 어둠은 어디를 흘러 여기까지 온 걸까

  비린 방마다 돋는 풀은 새벽별이 초록의 눈을 맞추거나

  죽은 날벌레가 흔들려도 피하지 않는다.

  밤새 왜 눈물을 만드는지 몰라도 죽은 청춘이 눕는

  투명한 새벽의 연한 풀이기를 그때,

  황새가 내 유년을 물고 도둑의 소굴로 쳐들어간다면

  유행 패션을 벗고 별모양의 은전을 나눠 주겠다

  모두스비벤디 퍼즐 같은 혁명을 입고 서자로 태어난 가혹을 요구로 바꿔 주는

  거무튀튀한 얼굴이라도 활빈당이기를

  그렇게, 홀씨처럼 허공을 떠돌다

  어린 송아지의 화관이 아니더라도 수세미가 열리는 담장 아래가 아니더라도

  후생은 관(棺)처럼 꼭 맞는

  꼭 알맞은 자리이기를

 

  두꺼운 양피를 벗기듯 바람의 목청처럼 속을 뒤집으며 벗겨져 나오는 울음소리

  옹이가 박히는 나무로라도 난간을 붙잡는 귀양지는

  바다 빛에 눈이 먼 강진이기를

 

  여기,

  나는 적재(適材)도 없는 어느 적소(適所)를 흘러 다녔을까

 

웹진 『시인광장』 2013년 1월호 발표

 

 


 

이미화 시인

2011년 《현대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