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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아파트 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30.

김지하 시인 / 아파트 꿈

 

 

나는

아파트에다

토담집을 짓는다

 

아파트 사이사이로

돌아 나가는 강물이 있어

산책길에

내 발을 적신다

 

음악이 들리는 창문

장미가 피는 창문

라일락이 서 있는 창문은

모두 다 내 집이다

 

내 눈의 집

 

저녁달이 오르면

내 눈은 거대한 우주가 되어

아파트 위에 둥실 뜬다

 

내 눈은 이제

 

푸른 초원 비취는

구월 밤의

빛.

 

 


 

 

김지하 시인 / 애린

 

 

외롭다.

이말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가는 빗살

빗살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다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남 날들 스쳐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건넬이

이세상엔 이미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줄수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짐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소리 한자락

이리 외롭다.

 

 


 

 

김지하 시인 / 엽서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김지하 시인 / 일산시첩(一山詩帖)

 

 

외로울 땐

풀잎 하나도 정답다

 

하늘 가득 스모그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개지

 

참새 지저귀고

아직도 꽃이 피고

 

하늘엔

흰 구름도 흐른다

아파트에 쭈그려 앉아

허공 한 쪽 볼 수 있으니

 

내 삶

아직도 괜찮다

 

고마워

눈물난다

 

 


 

 

김지하 시인 / 저녁 산책

 

 

숙인 머리에

종소리 떨어지고

 

새들이 와 우짖는다

 

숙인 머리에

바람이 와 소스라치고

 

가슴 펴라

가슴 펴라 악쓰고

 

숙인 머리에

별 뜬다

 

오늘밤은 무슨 꿈을 꾸랴

먼 하늘엔 새빨간

노을 쏟아지고.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