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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아파트 꿈
나는 아파트에다 토담집을 짓는다
아파트 사이사이로 돌아 나가는 강물이 있어 산책길에 내 발을 적신다
음악이 들리는 창문 장미가 피는 창문 라일락이 서 있는 창문은 모두 다 내 집이다
내 눈의 집
저녁달이 오르면 내 눈은 거대한 우주가 되어 아파트 위에 둥실 뜬다
내 눈은 이제 빛
푸른 초원 비취는 구월 밤의 빛.
김지하 시인 / 애린
외롭다. 이말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가는 빗살 빗살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다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남 날들 스쳐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건넬이 이세상엔 이미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줄수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짐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소리 한자락 이리 외롭다.
김지하 시인 / 엽서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김지하 시인 / 일산시첩(一山詩帖)
외로울 땐 풀잎 하나도 정답다
하늘 가득 스모그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개지
아 참새 지저귀고 아직도 꽃이 피고
하늘엔 흰 구름도 흐른다 아파트에 쭈그려 앉아 허공 한 쪽 볼 수 있으니
내 삶 아직도 괜찮다
고마워 눈물난다
김지하 시인 / 저녁 산책
숙인 머리에 종소리 떨어지고
새들이 와 우짖는다
숙인 머리에 바람이 와 소스라치고
가슴 펴라 가슴 펴라 악쓰고
숙인 머리에 별 뜬다
오늘밤은 무슨 꿈을 꾸랴 먼 하늘엔 새빨간 노을 쏟아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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