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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 / 열매
비엔나 오페른 링의 시월 저녁. 걸어가는 가늘고 낮은 바람 사이로 한 나그네가 다른 나그네를 알아본다.
철새도 아닌 새들까지 다 어디로 부산하게 떼지어 날아 가버리는 시간, 아무 이야기라도 눈자위를 적시고 마는 낯모를 골목길을 오래 헤매면서도 나는 아무런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느덧 꽃과 나비의 세월 다 지나고 마지막 떠나는 새들에게 먹히기 위해 더 진한 색깔로 하나씩 열매를 장식하는 그림자도 지워버린 나무의 지혜여 천하가 도도히 헛것으로 향해 간다는 음침한 소문 속에서도 열매를 익힌다.
혹은 환갑을 한두 해 남긴 김광규 시인이 혼자 장바구니 든 채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오페른 링의 길고 미지근한 저녁 미소가 내게는 하나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열매의 땀방울이여, 욕심을 버리려고 몸을 터는 이 계절의 나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될 수 없고 보이는 몸은 영원한 몸이 될 수가 없다.
마종기 시인 / 이 세상의 긴 강(江)
며칠 동안 혼자, 긴 강이 흐르는 기슭에서 지냈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없었고,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없었다.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음악이 물과 바위 사이에 살아 있었고, 풀잎 이슬 만나는 다른 이슬의 입술에 미술이 살고 있었다. 땅바닥을 더듬는 벌레의 가는 촉수에 사는 시, 소설은 그 벌레의 깊고 여유 있는 여정에 살고 있었다.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물이, 나뭇잎이, 구름이, 새와 작은 동물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빗물이 밤벌레의 울음이,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과 강의 물빛과 그 모든 것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세상이 내 몸 주위에서 나를 밀어내며 내 몸을 움직여 주었다. 나는 몸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무성한 나뭇잎의 호흡법을 흉내내어 숨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내 살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쉬는 몸이, 불안한 내 머리의 복잡한 명령을 떠나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벼워지고 눈이 밝아지고, 나무 열매가 거미줄 속에 숨고, 갑옷의 곤충이 깃을 흔들어내는 사랑 노래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였다. 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고, 살고 죽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게는 어려운 결심이었다. 며칠 후 인적없는 강기슭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하자 강은 말없이 내게 다가와 맑고 긴 강물빛 몇 개를 내 가슴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강이 되었다.
마종기 시인 / 이름 부르기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검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운문의 목소리로 이름 불러대면 어느 틈에 비슷한 새 한 마리 날아와 시치미떼고 옆가지에 앉았다. 가까이서 날개로 바람도 만들었다.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새가 언제부턴가 오지 않는다. 아무리 이름 불러도 보이지 않는다. 한적한 가문 밤에는 잠꼬대되어 같은 가지에서 자기 새를 찾는 새.
방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늙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목소리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었을까.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마종기 시인 / 전화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맑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에서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마종기 시인 / 추운 날의 질문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인가. 겨울바람에 피부가 터진 말채 나무가 대답도 없이 웃는다. 꿈꾸는 사람은 행복하다.
환갑 넘은 바람 몇 개가 일어나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게으른 열매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라며 낮은 하늘을 흔들어댄다.
이 추위를 보내면 한 세월이 가고 하얀 말채 나무 꽃이 온몸을 덮는다니 그때면 내 뻣속에 감추었던 우수의 철책 거두고 정처 없던 긴 여행을 마무리해야지.
늙은 새 한 마리가 날갯짓 멈추고 얼어버린 하늘을 겨우 넘어가는가, 하늘이 늙은 새를 안아주고 있는가.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인가. 완전하다는 것도 분명하다는 것도 빈 말채 나무에서는 보이지 않고 맑고 푸르른 유혹의 발걸음이 겨울이 끝나는 날처럼 따뜻하구나.
마종기 시인 / 축제의 꽃
가령 꽃 속에 들어가면 따뜻하다. 수술과 암술이 바람이나 손길을 핑계 삼아 은근히 몸을 기대며 살고 있는 곳.
시들어 고개 숙인 꽃까지 따뜻하다. 임신한 몸이든 아니든 혼절의 기미로 이불도 안 덮은 채 연하고 부드러운 자세로 깊이 잠들어버린 꽃.
내가 그대에게 가는 여정도 따뜻하리라. 잠든 꽃의 눈과 귀는 이루지 못한 꿈에 싸이고 이별이여, 축제의 표적이여. 애절한 꽃가루가 만발하게 우리를 적셔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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