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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유환 시인 / 슬픔의 서식지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9.

강유환 시인 / 슬픔의 서식지

 

 

  1

 

  상사는 열 번도 넘게 속을 뒤집었다 공인된 칸막이를 뚫고 세부적으로 끼어들었다 단박에 제압하지 못하고 웃으며 속으로만 크게 엑스를 쳤다 그의 큰 가새표가 보였다 적절한 전달체계였으나 내일 나는 더 환하게 환장해야 한다

 

  2

 

  슬로비디오로 넘어가는 토요일 오후 스스로 들어가서 미궁이 돼버린 사람들을 통독하다가 잠시 연잎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본다 섞이고 떼어지고 이어지기를 거듭하다가 그대로 낙하해버리는 식상한 일생 잎 위를 흘러가는 변환의 귀재를 바라본다

 

  3

 

  질긴 관계도가 유산인 그녀가 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이들을 향해 울음으로 자신을 알린다 엎어지며 뒹굴며 울음으로 위로받았던 날들을 전부 가슴에다 꿰매놓고 울음주머니를 부풀린다 울음 속에는 실종된 수많은 관계가 모여 있다 그녀는 늘 연잎 위에 있었다

 

  4

 

  되돌아 나올 길을 알려주는 실이 없던 그녀는 자신을 헐어내어 실을 만들었다 풀어낼 수 없이 엉킨 실타래였다 나는 방랑을 비책으로 삼은 이의 영혼에는 실꾸리가 없다 절연이다 생겨난 것은 독자적이어야 한다고 기록하다가 내가 그녀를 미궁으로 밀어 넣었음을 알았다

 

  5

 

  교차하는 차 유리창에 나랑 닮은 얼굴들이 돋아났다 달아나버린다 언제 어디서든 소인을 찍지도 않고 불쑥 개봉되는 나는 얼마나 많은 관계들의 집중국인가 나를 감았다 풀었다 반복하는 체계에 오늘도 나는 더 가까워졌다 가지런해졌다 발밑이 연잎 위였다

 

웹진 『시인광장』 2013년 1월호 발표

 

 


 

 

 강유환 시인

전남 무안에서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와 고려대학교 박사과정 졸업. 2000년《시안》가을호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꽃, 흰빛 입들』(시안, 2012)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