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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종기 시인 / 메아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9.

마종기 시인 / 메아리

 

 

작은 호수가 노래하는 거

너 들어봤니.

피곤한 마음은 그냥 더 잠자게 하고

새벽 숲의 잡풀처럼 귀 기울이면

진한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물이 노래하는 거 들어봤니?

긴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첼로 소리인지 아코디언인지.

멀리서 오는 밝고 얇은 소리에

새벽 안개가 천천히 일어나

잠 깨라고 수면에서 흔들거린다.

아, 안개가 일어나 춤을 춘다.

사람 같은 형상으로 춤을 추면서

안개가 안개를 걷으며 웃는다.

그래서 온 아침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우리를 껴안는

눈부신 물의 메아리

 

 


 

 

마종기 시인 / 방문객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는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 덮인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 손으로 내가 받는다.

 

 


 

 

마종기 시인 /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 잔 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뜨고 해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마종기 시인 / 산행 2

 

 

이른 아침에는 나무도 우는구나

가는 어깨에 손을 얹기도 전에

밤새 모인 이슬로 울어버리는구나.

누가 모든 외로움을 말끔히 씻어주랴.

아직도 잔잔히 떨고 있는 지난날,

잠시 쉬는 자세로 주위를 둘러본다.

앞길을 묻지 않고 떠나온 이번 산행,

정상이 보이지 않는 것 누구 탓을 하랴.

등짐을 다시 추슬러 떠날 준비를 한다.

시야가 온통 젖어 있는 길.

 

 


 

 

마종기 시인 / 시선

 

 

어떤 시선에서는 빛이 나오고

다른 시선에서는 어두움 내린다

어떤 시선과 시선은 마주쳐

자식을 낳았고

다른 시선과 시선은 서로 만나

손잡고 보석이 되었다

 

다 자란 구름이 헤어질 때

그 모양과 색깔을 바꾸듯

숨 죽인 채 달아오른 세상의 시선에

당신의 살결이 흩어졌다

 

어디서 한 마리 새가 운다

세상의 바깥으로 나가는 저 새의 시선

시선에 파묻히는 우리들의 추운 손잡기

 

 


 

 

마종기 시인 / 어느 날 문득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긴 질긴 내 그림자가

팔 잘린 고목 하나를 키워놓았어.

봄이 되면 어색하게 성긴 잎들을

눈 시린 가지 끝에 매달기도 하지만

한세월에 큰 벼락도 몇 개 맞아서

속살까지 검게 탄 서리 먹은 고목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은 힘 지친 잉어 한 마리

물살 빠른 강물 따라 헤엄치고 있었어.

정말 헤엄을 치는 것이었을까,

물살에 그냥 떠내려가는 것이었을까.

결국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못한 채

잉어 한 마리 눈시울 붉히며 지나갔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모두 그랬어, 어디로들 가는지.

고목이나 잉어는 나를 알아보았을까.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뚝심이 없었던 젊은 하늘에서

며칠 내 그치지 않는 검은색 빗소리.

 

 


 

 마종기 시인

1939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연세대 의대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월간 『현대문학』 1959년 1월호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발표 이후 3회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조용한 개선(凱旋)』, 『두번째 겨울』, 『변경(邊境)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등의 시집과 공동 시집 『평균율』Ⅰ·Ⅱ이 있음.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