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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철 시인 / 정물의 세계4 -진공
1
내가 유령인가 당신이 유령인가. 나는 사라지면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당신도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나타난다.
내가 극장에 있다고 하면 극장에 있고 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하면 직장에 있고 내가 이별을 해서 아파하면 아파하고 있고 내가 사랑을 해서 기쁘다 하면 기쁘다.
더 이상 명징한 게 있을까.
이러한 허구는 그 누가 조종하는가.
맛있다, 즐겁다, 슬프다, 기쁘다, 역겹다, 너무나 아름답다 등등.
당신은 정말 내 곁에 있었던가. 아니면 유령인가. 당신은 왜 없고 내 곁에 남은 것은 기억뿐인가. 내 기억을 증명할 만한 그 어떤 문서도 내 영혼 속엔 보관되어 있지 않다.
나는 텅 빈 무, 나는 바뀌는 사물 안에 있는 부동자. 아니면 나는 바뀌는 사물 중 하나, 나는 스크린 속의 입자.
시간의 나룻배를 타고 풍속 37km로 달리고 있다. 나는 이 바람이 참 좋다. 사라지는 풍경 안의 사람들이 그립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 실체가 아니라도 나는 그들이 그립다. 내가 명징하게 말할 수 있는 말들은 없다. 혹 이미지가 전복되는 순간 나는 거짓말의 참말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불환지폐를 주는 데 왜 당신은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을 주는가. 나는 나의 노동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 불가능한 것을 감내하고 있는 저 이미지는 사람인가, 유령인가.
살아있는가. 밥은 먹고 다니는가. 자신이 죽은 자인지 몰라 혹 저렇게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가.
있는 것이 무엇이고 없는 것이 무엇인가. 왜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있는가. 셰익스피어 말처럼 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인가.
왜 내 주변의 공간 안에 위치한 사물은 변화하는가. 그 공간 안에 위치한 사물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시간의 나룻배를 타고 있어서 사물은 정물의 세계가 되는가.
공간은 유령의 집,
모두 공간 안에 사로잡혀 있는 유령들이다. 공간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유령들, 공간의 그리움이 그들을 불러들인다. 혼이 없는 유령들이 출근하다. 다리의 영혼이 발의 정신을 이끌고 간다. 당신은 유령인가, 살아있는 사람인가.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상실, 방황, 슬픔, 좌절 이러한 단어가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쩔 수 없다는 당신의 거짓말 속의 참말과 거짓말 사이를 오가는 당신의 눈빛은 슬프다. 그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혼을 잃어버린 좀비다.
너무나 빠른 속도는 속도가 아니라 폭력이다.
당신은 살아 있는가. 죽어서도 잊지 못할 사랑은 있는가.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게 막을 방법은 없는가.
왜 진리는 항상 눈 뜨고 있어야 하는가. 죽어서도 감지 못할 눈은 무엇인가.
감내하는 것은 나인가 당신인가. 꼭 당신들이 살아 있는 사람이기를 당부한다. 나는 유령으로 떠돌 것이다.
2
-아킬레우스를 뒤쫓는 화살은 영원히 아킬레우스를 따라 잡지 못한다. 아킬레우스가 흘린 영원은 비웃음일 뿐이다.
하늘의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저물녘 고환을 늘어뜨린 낙타와 붓다가 흘린 웃음바람을 배낭에 메고 사자가 먹다 버린 육포를 질긴 이로 물어뜯으며 풀린 동공을 질끈 동여 멘다. 열 손가락을 절단해서 해탈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입 안에서 물고기들이 울컥울컥 넘쳐 흘러나오고 툭툭 떨어지는 손톱 발톱의 벼랑들 눈썹을 흔드는 쥐며느리.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고통의 크레파스 삼지창을 든 새끼악마 위 아래로 두개골을 흔드는 웃음이 진동한다.
-내가 당신을 그리는 사이 당신은 물감에 녹아 없어지고 싶겠지.
영혼의 한숨과 육체의 졸음을 이길 수 있는 의지와 인내하다 졸도할 수 있는 열정과 피그말리온으로 내리치는 도끼로 영원히 찍어도 녹지 않는 시린 눈의 결빙의 힘을 빌려 주시면 불덩이와 빙정에 갇힌 영혼의 철창을 뜯어 오를 수 없는 하늘과 꺼지지 않는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불사의 혼들을 거둘 것이며 천지인의 정기를 모아 만든 눈물 한 방울로 타락하고 번뇌하는 모든 영혼들의 고향을 거둘 것이다.
당신 동공에서 뜨는 해와 달과 당신 육체를 이탈한 영혼은 영원히 닿고 헐지 않는 구름의 신발이다.
3
줄을 당겨야만 나아갈 수 있는 거리가 있다.
한꺼번에 당겨진 거리가 있다.
나아가면서 끝없이 후퇴하는 게 무얼까.
나아가는 것도 후퇴하는 것도 아닌 정지하고 있는 활.
나아가면서 끝없이 후퇴한다.
후퇴의 끝, 당김 혹은 당겨진 힘.
활대에 붙는 공기, 활대에 붙는 마찰,
불타는-당김 혹은 당겨진 힘.
급속하게 냉각되는 힘.
활은 과녁에서 얼어붙는다.
활꽃이 핀다.
4
아름다움은 축소다. 점화, 폭발이다.
이별은 진공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폭발음이 있었고 그 안에는 연소의 불꽃이 총알의 꼬리를 붙잡고 시간과 공간이 든 상자를 일순간 마법으로 사라지게 하는 꿈의 연소를 일으킨다. 사라진다. 모든 것이 일순간 압축된다. 공간과 시간이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충돌 하는 것이다. 진공을 경험하는 자는 일순간 대륙의 지형이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단 1초에 몇 억만년에 가능한 대륙이동을 경험한다. 어떻게 진공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연소됐을까. 어떻게 사라진다는 것이 가능하지.
한순간 공간과 시간이 소멸한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없어지는 것 안에는 연소가 있었다.
진공 상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시 연소가 발생한다.
진공을 못 견뎌하는 공간과 시간이 일순 압축된다.
소멸이 진공 상태를 만든다.
진공 속에서 내장기관이 압축된다.
터진 자리마다 꽃이 핀다.
진공이 만들어낸 꽃. 심장이 터질듯하다.
그 안에서는 분명 폭발음이 울렸을 것이다.
연소의 불꽃 또한 보지 못한다.
0
어느 날 당신에게 스며있던 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내릴 때 나는 알았다, 설명할 수 없는 당신의 진공을.
당신의 목소리는 분명 폭발음 안에 있었을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3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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