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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 골짜기
오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외롭고 깊고 모진 골짜기를 떠나 저 푸른 골짜기로
그는 다시 골짜기에 맑은 샘처럼 생겨나겠지 백일홍을 심고 석등을 세우고 산새를 따라 골안개의 은둔 속으로 들어가겠지 작은 산이 되었다가 더 큰 산이 되겠지 언젠가 그의 산호(山戶)에 들르면 햇밤을 내놓듯 쏟아져 떨어진 별들을 하얀 쟁반 위에 내놓겠지
문태준 시인 / 그믐이라 불리던 그녀
옻처럼 검고 얼음처럼 차디차지만 얼굴에는 개미굴이 여럿 나 있지만 다리는 사슴보다 야위었지만 그녀의 너른 속뜰로 들어가 마음이 쉬어 가는 날이 많았다 나는 그 이상한 평온을 슬픈 그믐이라 불렀다 조모를 열다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보았다
문태준 시인 / 꽃 진자리에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문태준 시인 / 꽃이 핀다
뜰이 고요하다 꽃이 피는 동안은
하루가 볕바른 마루 같다
맨살의 하늘이 해 종일 꽃 속으로 들어간다 꽃의 입 시울이 젖는다
하늘이 향기 나는 알을 꽃 속에 슬어놓는다
그리운 이 만나는 일 저처럼 이면 좋다
문태준 시인 /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호두나무 잎에 어둠이 뭉쳐있을 때 그 끝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외로운 산 까치처럼 나는 살아왔다 거친 꽃을 내뱉으며 늙은 영혼의 속을 꺼내 보이는 할미꽃처럼 나는 살아 왔다 그러나, 허물을 벗어놓고 여름을 우는 매미처럼 하나의 열망으로 노래하리니 꾹꾹 허공에다 지문을 눌러 찍으며 물결쳐 가는 노래여 절절 끓는 아랫목으로 불 들어가듯 가는 노래여 더 슬픈 노래여 나는 이제 심장을 바치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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