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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 / 고독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 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문정희 시인 / 나를 낳은 달
나를 낳은 건 흙이나 학교가 아니었다 떠나가라 떠나가라 소리치며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달, 그녀의 깊은 주름살을 오늘은 어머니라 부른다 맨드라미 같은 붉은 벼슬의꿈과 날마다 알을 낳는 힘과 밤마다 사랑을 만드는 눈물을 그녀가 아니면 어디에서 배웠으랴 모든 생명을 온기로 품어 살아있는 대지의 체온 모든 상처를 맑게 씻어
결국은 빛나는 생명의 눈부심을 나를 낳은 달, 그녀가 아니면 어디서 보았으랴 지난 여름 매미채 하나씩 들고 도회로 떠난 아이들은 고향에 쉬이 돌아올 수 없는 거인이 되었다지만 그래서 기쁘고 쓸쓸한 나를 낳은 달 가을 창가에 홀로 핀 꽃처럼 환환 웃음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정희 시인 /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숨죽여 홀로 운 것도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지막처럼 고백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두려워하며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한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문정희 시인 / 독거
나하고 나뿐이다 뼛속에 유빙(遊氷)이 떠다닌다
나는 나이테 없는 식물 같은 동물 피다 증발해버린 빙하기를 사는 독거의 꽃
불가해한 선사(先史)에서 흘러온 소금 기둥이다
불꽃의 순간을 두들기는 허공의 하루살이이다
나하고 나하고 나뿐이다
문정희 시인 / 돌아가는 길
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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