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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태준 시인 / 바깥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31.

문태준 시인 / 바깥

 

 

장대비 속을 멧새 한마리가 날아간다

彈丸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全速力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 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中心으로?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문태준 시인 /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문태준 시인 /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 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철름 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 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문태준 시인 / 석류

 

 

윗옷 단추를 끄르듯

웃음이

웃음의 앞자락을 헤치며

 

석류는 툭 터졌네

넘어진 화병처럼

 

언제라도

비탄이 없는

악보

 

속 깊은 가을의

정교한 건축

 

붉은 잇몸의 빛

알알이

조용한 시간의 카펫 위에

흩어지네

 

 


 

 

문태준 시인 / 수평(水平)

 

 

단 하나의 잠자리가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염주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투명한 두 날개를 수평으로 펼쳤다

모시 같은 날개를 연잎처럼 수평으로 펼쳤다

좌우가 미동조차 없다

물 위에 뜬 머구리밥 같다

나는 생각의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는데

가문 날 땅벌레가 봉긋이 이어놓은 땅구멍도 보고

마당을 점점 덮어오는 잡풀의 억센 손도 더듬어보는데

내 생각이 좌우로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잠자리는 여전히 고요한 수평이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하늘은 이렇게 무서운 수평을 길러내신다

 

 


 

문태준(文泰俊, 1970년 ~ ) 시인

1970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나 김천고등학교를 졸업. 1955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處暑〉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2004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2005년 〈미당문학상〉, 2006년 〈소월시문학상〉, 2014년 〈서정시학작품상〉, 2018년 〈목월문학상〉을 수상.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창작과비평사, 2000). 《맨발》(창비, 2004).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그늘의 발달》(문학과지성사, 2008). 《먼 곳》(창비, 2012).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2015).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