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상 시인 /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사랑의 큰 진리를 배반한 죄의 값으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조국과 아시아의 세계 멸망의 낭떠러지에서 발을 멈추고 새 역사를 기다리자
우리들의 새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순풍에 돛 달고 오는 유람선같이 오진 않으리 얼굴과 몸뚱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로 오리라
우리들의 새 역사는 상처투성이지만 이기고 돌아오는 역전의 개선장군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리니 그 날에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 그와 함께 서리라
이은상 시인 / 스승과 제자
또 한 고개 높은 재 넘어 낭떠러지 길가에 앉아 고달픈 다리를 쉬노랄 제 뒤에서 돌격대처럼 달려와 '선생님'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껴안는 병정 한 사람
반가와라 이게 누군고 군인이 된 나의 제자 길목 지키는 파수병으로 이 깊은 산협에서 만나보다니 두 손목 서로 붙들고 어루만지다 이야기하다
산협길 멀고 험하고 해조차 뉘엿이 기울건마는 차마 서로 못 나뉘어 손목을 놓았다 잡았다 헤어져 산모퉁이 돌 때까지 몇 번이나 되돌아보고
이은상 시인 / 신록 속에 서서
흙탕물 쏟아져 내리던 전쟁의 악몽과 화상 여기선 신록조차 눈에 서툴러 다른 나라의 풍경화 같네 역사의 배반자라는 낙인찍힌 우리들이기에
이 시간에도 온갖 죄악을 아편처럼 씹으면서 갈수록 비참한 살육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거룩한 신록의 계절을 모독하는 무리들!
그러나 우리들 가슴속에는 마르지 않은 희망의 샘 줄기 어둠의 세기 복판을 운하처럼 흐르고 있다 기어이 이 물줄기 타고 가리라 통일과 평화의 저 언덕까지
이은상 시인 / 천지송
보라, 저 울멍줄멍 높고 낮은 산줄기들 저마다 제자리에 조용히 엎드렸다. 산과 물 어느 것 한 가지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황금 방울같이 노오란 저녁 해가 홍비단 무늬 수를 놓고 있다. 저기 저 구름 한 장도 함부로 건 것 아니로구나.
지금 저 들 밖에 깔려 오는 고요한 황혼! 오늘밤도 온 하늘에 보석 별들이 반짝이리 그렇다! 천지 자연이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이은상 시인 / 칡꽃마을 이야기
시인은 막대 끌고 또 한 고지에 올랐더니 파수 서 있는 병정 한 사람 산 밑 마을 가리키며 겪어 온 기구한 사연 들려주는 이야기--
'바로 저 아래 보이는 칡꽃마을이 내 고향이죠 저기 약수터가 있어 거기 가 빌면 소원성취 한다기 약속한 처녀랑 하냥 아침저녁 같이 다녔죠'
'그러다 전쟁이 터져 온 마을이 불타버리고 모두들 죽고 흩어지고 나는 뽑혀서 군인이 되고 처녀는 마을을 못 벗어나 비참하게도 숨져버리고'
'나는 전투부대 따라 이곳 저곳 옮아 다니다 지금은 뜻밖에도 이 고지 감시대 파수병이 되어 날마다 칡꽃마을 내 고향 내려다보며 섰지요'
'저기 있는 약수터도 영험이 없나봐요 그렇게도 빌었었는데 소원성취 못하고서 옛 처녀 그려 보면서 명복을 빌며 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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