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이은상 시인 /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9.

이은상 시인 /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사랑의 큰 진리를

배반한 죄의 값으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조국과 아시아의 세계

멸망의

낭떠러지에서 발을 멈추고

새 역사를 기다리자

 

우리들의 새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순풍에 돛 달고 오는

유람선같이 오진 않으리

얼굴과

몸뚱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로 오리라

 

우리들의 새 역사는

상처투성이지만 이기고 돌아오는

역전의 개선장군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리니

그 날에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 그와 함께 서리라

 

 


 

 

이은상 시인 / 스승과 제자

 

 

또 한 고개 높은 재 넘어

낭떠러지 길가에 앉아

고달픈 다리를 쉬노랄 제

뒤에서 돌격대처럼 달려와

'선생님'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껴안는 병정 한 사람

 

반가와라 이게 누군고

군인이 된 나의 제자

길목 지키는 파수병으로

이 깊은 산협에서 만나보다니

두 손목

서로 붙들고

어루만지다 이야기하다

 

산협길 멀고 험하고

해조차 뉘엿이 기울건마는

차마 서로 못 나뉘어

손목을 놓았다 잡았다

헤어져

산모퉁이 돌 때까지

몇 번이나 되돌아보고

 

 


 

 

이은상 시인 / 신록 속에 서서

 

 

흙탕물 쏟아져 내리던

전쟁의 악몽과 화상

여기선 신록조차 눈에 서툴러

다른 나라의 풍경화 같네

역사의

배반자라는

낙인찍힌 우리들이기에

 

이 시간에도 온갖 죄악을

아편처럼 씹으면서

갈수록 비참한 살육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거룩한

신록의 계절을

모독하는 무리들!

 

그러나 우리들 가슴속에는

마르지 않은 희망의 샘 줄기

어둠의 세기 복판을

운하처럼 흐르고 있다

기어이

이 물줄기 타고 가리라

통일과 평화의 저 언덕까지

 

 


 

 

이은상 시인 / 천지송

 

 

보라, 저 울멍줄멍 높고 낮은 산줄기들

저마다 제자리에 조용히 엎드렸다.

산과 물 어느 것 한 가지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황금 방울같이 노오란 저녁 해가

홍비단 무늬 수를 놓고 있다.

저기 저 구름 한 장도 함부로 건 것 아니로구나.

 

지금 저 들 밖에 깔려 오는 고요한 황혼!

오늘밤도 온 하늘에 보석 별들이 반짝이리

그렇다! 천지 자연이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이은상 시인 / 칡꽃마을 이야기

 

 

시인은 막대 끌고

또 한 고지에 올랐더니

파수 서 있는 병정 한 사람

산 밑 마을 가리키며

겪어 온

기구한 사연

들려주는 이야기--

 

'바로 저 아래 보이는

칡꽃마을이 내 고향이죠

저기 약수터가 있어

거기 가 빌면 소원성취 한다기

약속한

처녀랑 하냥

아침저녁 같이 다녔죠'

 

'그러다 전쟁이 터져

온 마을이 불타버리고

모두들 죽고 흩어지고

나는 뽑혀서 군인이 되고

처녀는

마을을 못 벗어나

비참하게도 숨져버리고'

 

'나는 전투부대 따라

이곳 저곳 옮아 다니다

지금은 뜻밖에도

이 고지 감시대 파수병이 되어

날마다

칡꽃마을 내 고향

내려다보며 섰지요'

 

'저기 있는 약수터도

영험이 없나봐요

그렇게도 빌었었는데

소원성취 못하고서

옛 처녀

그려 보면서

명복을 빌며 살지요

 

 


 

이은상(李殷相) 시인 / 1903∼1982

시조 시인. 호는 노산(鷺山). 경남 마산에서 출생. 마산 사립 창신 학교 고등과를 나와 1923년에 연희 전문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 유학, 와세다 대학 사학과에서 수업하였다. 그 후 월간지 '신생'을 편집했고, 1931년에 이화 여전 교수가 되었다. 광복 후 '호남 신문' 사장과 서울대,영남대 교수등을 지냈고, 1954년에는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그 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 사업 회장, 민족 문화 협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시조 작가 협회장 및 숙명여대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4년에 노산 시조 문학상을 제정하였고, 1981년에 국정 자문 위원에 위촉되었다. [봄처녀] [옛동산에 올라] [가고파] 등으로 고유한 전통의 시 형식인 시조

의 현대화에 기여하였고, 1932년에 간행된 '노산 시조집'은 1920년대의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의 시조 부흥론에 의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저서에는 '이충무공 일대기' '민족의 향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