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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행복의 얼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2. 12.

김현승 시인 / 행복의 얼굴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김현승 시인 / 감사

 

 

감사는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드리고 바친다.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寶石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納辯의 詩로...... .

 

 


 

 

김현승 시인 / 길

 

 

나의 길은

발을 여이고

배로 기어간다

五月의 가시밭을.

 

너의 길은

빵을 잃고,

마른 혀로 입맞춘다

七月의 황톳길을.

 

그대의 길은

사랑을 잃고,

꿈으로만 떠오른다

十月의 푸른 하늘을.

 

우리의 길은

머리를 잃고,

가는 꼬리를 휘저으며 간다

山河에 머흘한 구름 속으로.

 

 


 

 

김현승 시인 / 내일

 

 

나는 이렇게 내일을 맞으련다.

모든 것을 실패에게 주고,

비방은 원수에게,

사랑은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에게......

 

나의 잔에는

천년의 어제보다 명일(明日)의 하루를

넘치게 하라.

 

내일은 언제나 내게는 축제의 날,

꽃이 없으면 웃음을 들고 가더래도.......

 

내일,

오랜 역사보다도

내일만이 진정 우리가 피고 가는

풍성한 흙이 아니냐?

 

 


 

 

김현승 시인 / 바다의 육체(肉體)

 

 

푸른 잉크로 시를 쓰듯

백사장의 깃은 물결에 젖었다.

 

여기서는 바람은 나푸킨처럼 목에 걸었다.

여기서는 발이 손보다 희고

게는 옆으로 걸었다.

 

멀리 이는 파도-- 바다의 쟈스민은 피었다 지고,

 

흑조빛 밤이 덮이면

천막이 열린 편으로

유성들은 시민과 같이 자주 지나갔다.

별들은 하나하나 천년의 모래 앞에 씻기운

천리 밖의 보석들......

 

바다에 와서야

바다는 물의 육체만이 아님을 알았다.

 

뭍으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파도에서 배운 춤을 일깨우고,

내 꿈의 수평선을 머얼리 그어 둘 테다!

 

나는 이윽고 푸른 바다에 젖는 손수건이 되어

뭍으로 돌아왔다.

 

 


 

 

김현승 시인 / 오월의 그늘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그늘,

밝음에 너는 옷을 입혔구나

우리도 일일이 형상을 들어

때로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이 밝음, 이 빛은

채울 대로 가득히 채우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구나

그늘―너에게서……

 

내 아버지의 집

풍성한 대지의 원탁마다

그늘,

오월의 새 술들 가득 부어라!

 

이팝나무―네 이름 아래

나의 고단한 꿈을 한때나마 쉬어 가리니……

 

 


 

김현승(金顯承,1913 ~ 1975) 시인

1913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스승 양주동의 소개로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첫시집 『김현승 詩抄』(1957)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선집』(1974) 등의 시집과 평론집 『한국현대시해설』(1972) 등을 간행. 전라남도문화상·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작고 후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