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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꿈을 생각하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2. 11.

김현승 시인 / 꿈을 생각하며

 

 

목적은 한꺼번에 오려면 오지만

꿈은 조금씩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한다.

 

목적은 산마루 위 바위와 같지만

꿈은 산마루 위의 구름과 같아

어디론가 날아가 빈 하늘이 되기도 한다.

 

목적이 연을 날리면

가지에도 걸리기 쉽만

꿈은 가지에 앉았다가도 더 높은 하늘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에 목적엔 아름다운 담장을 두르지만

꿈의 세계엔 감옥이 없다.

 

이것은 뚜렷하고 저것은 아득하지만

목적의 산마루 어디엔가 다 오르면

이것은 가로막고 저것은 너를 부른다.

우리의 가는 길은 아 ㅡ 끝 없어

둥글고 둥글기만 하다.

 

 


 

 

김현승 시인 / 지각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김현승 시인 / 희망이라는 것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상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거리의 노을을 벗기지만 않으면….

 

희망.

그것은 너의 보석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으면….

 

희망.

희망은 스스로 네가 될 수도 있다.

다함 없는 너의 사랑이

흙 속에 묻혀,

눈물 어린 눈으로 너의 꿈을

먼 나라의 별과 같이 우리가 바라볼 때…

 

희망.

그것은 너다.

너의 생명이 닿는 곳에 가없이 놓인

내일의 가교(架橋)를 끝없이 걸어가는,

별과 바람에도 그것은 꽃잎처럼 불리는

네 마음의 머나먼 모습이다.

 

 


 

 

김현승 시인 / 마음의 집

 

 

네 마음은

네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

있다.

마치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

 

나의 피를 뿌리고

살을 찢던

네 이빨과 네 칼날도

내 마음의 아늑한 품속에선

어린아이와 같이 잠들고 만다.

마치 진흙 속에 묻히는

납덩이도 같이.

 

내 작은 손바닥처럼

내 조그만 마음은

이 세상 모든 榮光을 가리울 수도 있고,

누룩을 넣은 빵과 같이

아, 때로는 향기롭게 스스로 부풀기도 한다!

 

東洋의 智慧로 말하면

가장 큰 것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은 그 가없음을

내 그릇에 알맞게 줄여 넣은 듯,

바래움의 입김을 불면 한없이 커진다.

그러나 나의 지혜는 또한

風船처럼 터지지 않을 때까지만 그것을…

 

네 마음은

네 안에 있으나

나는 내 마음 안에 살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은 제 가시와 살보다

제 뿌리 안에 더 풍성하게 피어나듯…

 

 


 

 

김현승 시인 / 창

 

 

창을 사랑한다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십이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김현승(金顯承,1913 ~ 1975) 시인

1913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스승 양주동의 소개로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첫시집 『김현승 詩抄』(1957)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선집』(1974) 등의 시집과 평론집 『한국현대시해설』(1972) 등을 간행. 전라남도문화상·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작고 후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