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서·남·북으로 틔어 있는 골목마다 수국색(水菊色)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ㅡ무슨 일을 하고 싶다. ㅡ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ㅡ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이에 한 개씩 돋아난다.
박목월 시인 / 4월의 노래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지를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박목월 시인 / 내가 만일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도마뱀을 따라 꽃밭으로 가 보고, 잠자리처럼 연못에서 까불대고, 물 위에 뱅글뱅글 글씨를 쓰고, 그렇지, 진짜 시(詩)를 쓰지.
아침나절에는 이슬처럼 눈을 뜨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매미가 되어 숲으로 가지.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상 앞에 붙어 있을 줄 알아.
책에 씌인 것은 벽돌 같은 것. 차돌 같은 것. 그렇지, 살아서 반짝반짝 눈이 빛나는 그런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지.
내가 만일 너라면 조잘대는 냇물과 얘기를 하고, 풀잎배를 타고, 항구로 나가고, 무지개가 뿌리 박은 골짜기로 찾아가 보련만.
이제 나는 도리가 없다. 너무 자라버린 사람이기에. 어른은 어른은
참 따분하다. 그렇지, 내가 만일 어린 소년이라면 나는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박목월 시인 / 내리막길의 기도
오르막 길이 숨 차듯 내리막 길도 힘에 겹다. 오르막길의 기도를 들어주시듯 내리막길의 기도도 들어 주옵소서.
열매를 따낸 비탈진 사과밭을 내려오며 되돌아 보는 하늘의 푸르름을 뉘우치지 말게 하옵소서.
마음의 심지에 물린 불빛이 아무리 침침하여도 그것으로 초밤길을 밝히게 하옵시고
오늘은 오늘로써 충만한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어질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수록 안으로 환하게 눈 뜨게 하옵소서.
성신이 제 마음 속에 역사하게 하옵소서. 하순의 겨울도 기우는 날씨가 아무리 설레이어도 항상 평온하게 하옵소서.
내리막 길이 힘에 겨울수록 한 자욱마다 전력을 다하는 그것이 되게 하옵소서. 빌수록 차게 하옵소서.
박목월 시인 /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카드에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참말로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누굴 기다릴까. 네 개의 까만 눈동자. 네 개의 까만 눈동자.
그런 날에 외딴집 굴뚝에는 감실감실 금빛 연기, 감실감실 보랏빛 연기,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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