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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지훈 시인 / 가야금(伽倻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2. 15.

조지훈 시인 / 가야금(伽倻琴)

 

 

1. 휘영청 달 밝은 제 창 열고 홀로 앉다

품에 가득 국화 향기 외로움이 병이어라

 

푸른 담배 연기 하늘에 바람 차고

붉은 술그림자 두 뺨이 더워온다

 

천지가 괴괴한데 찾아올 이 하나 없다

宇宙가 茫茫해도 옛 생각은 새로워라

 

달 아래 쓰러지니 깊은 밤은 바다런 듯

蒼茫한 물결 소리 草屋이 떠나간다

 

2. 조각배 노 젓듯이 가얏고를 앞에 놓고

열두 줄 고른 다음 벽에 기대 말이 없다

 

눈 스르르 감고 나니 흥이 먼저 앞서노라

춤추는 열 손가락 제대로 맡길랏다

 

구름끝 드높은 길 외기러기 울고 가네

銀河 맑은 물에 뭇별이 잠기다니

 

내 무슨 恨이 있어 興亡도 꿈속으로

잊은 듯 되살아서 임 이름 부르는고

 

3. 風流 가얏고에 이는 꿈이 가이 없다

열두 줄 다 끊어도 울리고 말 이 心思라

 

줄줄이 고로 눌러 맺힌 시름 풀이랏다

머리를 끄덕이고 손을 잠깐 쓸쩍 들어

 

뚱뚱 뚱 두두 뚱뚱 흥흥 응 두두뚱 뚱

調格을 다 잊으니 손끝에 피맺힌다

 

구름은 왜 안 가고 달빛은 무삼일 저리 흰고

높아가는 물소리에 靑山이 무너진다 *

 

 


 

 

조지훈 시인 / 동야초

 

 

포플라나무 꼭대기에

깨어질 듯 밝은 차운 달을

앞 뒷산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개가 짓는다.

 

옛이야기처럼 구수한 문풍지 우는 밤에

마귀할미와 범 이야기 듣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따슨 아랫목

 

할머니는 무덤으로 가시고

화로엔 숯불도 없고

아. 다 자란 아기에게 젖줄이도 없어

외로이 돌아앉아 밀감을 깐다.

 

 


 

 

조지훈 시인 / 마음의 태양

 

 

꽃 사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자.

 

가시밭길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 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른다.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 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자.

 

 


 

 

조지훈 시인 /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로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 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제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조지훈 시인 / 산방(山房)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잎은

새삼 차운데

 

볕받은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자리에

움직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림 흔들리는

소소리 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조지훈 시인 / 산상(山上)의 노래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 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조지훈 시인 / 산중문답(山中文答)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오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난는 맛을

자네 태고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매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 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맛을 알 만합니더)

 

 


 

조지훈(趙芝薰) 시인 / 1920∼1968

본명은 동탁(東卓). 지훈은 호. 경북 영양에서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독학으로 검정 고시에 합격한 후 혜화 전문 학교 문과를 졸업. 광복 후 조선 문화 건설 협회 회원. 사망 때까지 고려대 교수로 재직. 1939년에 <문장>지에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1946년에 동기생인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하여 이후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움. 1957년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 1962년 고려대 민족 문화 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 문화사 대계>를 기획, <한국 문화사 시설> <신라 가요 연구 논고> <한국 민족 운동사>등의 논조를 남겼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남. 시집으로 <풀잎 단장>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등과 수필, 평론집으로 <창에 기대어> <시와 인생> <돌의 미학>, 역서로 <채담>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