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시인 / 후조
후조기에 애착일랑 금물이었고 그러기에 감상의 속성을 벌써 잊었에라 가장 태양을 사랑하고 원망함이 후조였거늘
후조는 유달리 어려서부터 날개와 눈알을 사랑하길 알았에라
높이 날음이 자랑이 아니에라 멀리 날음이 소망이 아니에라 날아야 할 날에 날아야 함이에라
달도 별도 온갖 꽃송이도 나를 위함이 아니에라
날이 오면 날아야 할 후조이기에 마음의 구속일랑 금물이었고 고독을 날려버린 기류에 살라 함이 에라
조병화 시인 / 벗
벗은 존재의 숙소이다 그 등불이다 그 휴식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먼 내일에의 여행 그 저린 뜨거운 눈물이다 그 손짓이다 오늘 이 아타미 해변 태양의 화석처럼 우리들 모여 어제를 이야기하며 오늘을 나눈다 그리고, 또 내일 뜬다
조병화 시인 / 사랑의 계절
해마다 꽃피는 계절이면 산에 들에 하늘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와 같이 집을 짓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어라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 아물아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매달려
한동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구름 끝에 그 누구와 같이 둥지를 치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둥, 둥, 떠가고 싶은 마음
아, 해마다 꽃돋는 나날이면 내 마음에 돋는 너의 봉오리.
조병화 시인 / 황홀한 모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 훗날 슬픔을 주는것을,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는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 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리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조병화 시인 / 기다림은 아련히
이제,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인생의 겨울로 접어들면서 기다림은 먼 소식처럼 아련해지며
맑게 보다 맑게 가볍게 보다 가볍게 엷게 보다 엷게 부담 없이 보다 부담 없이 스쳐 가는 바람처럼 가물가물하여라
긴 생애가 기다리는 세월 기다리면서 기다리던 것을 보내며 기다리던 것을 보내면 다시 기다리며 다시 기다리던 것을 다시 보내면 다시 또다시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어라, 하면서 이 인생의 겨울 저녁 노을 노을이 차가워라
기다릴 것도 없이 기다려지는 거 기다려져도 아련한 이 기다림 노을진 겨울이거늘
아, 사랑아
인생이 이러한 것이어라. 기다림이 이러한 것이어라
조병화 시인 / 나 돌아간 흔적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아시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 벌레 새끼치는 자리에 태어나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아 세상 수 만리 나 찾아 왔습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 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러 나 찾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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