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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후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2. 17.

조병화 시인 / 후조

 

 

후조기에 애착일랑 금물이었고

그러기에 감상의 속성을 벌써 잊었에라

가장 태양을 사랑하고 원망함이 후조였거늘

 

후조는 유달리 어려서부터

날개와 눈알을 사랑하길 알았에라

 

높이 날음이 자랑이 아니에라

멀리 날음이 소망이 아니에라

날아야 할 날에 날아야 함이에라

 

달도 별도 온갖 꽃송이도

나를 위함이 아니에라

 

날이 오면 날아야 할 후조이기에

마음의 구속일랑 금물이었고

고독을 날려버린 기류에 살라 함이 에라

 

 


 

 

조병화 시인 / 벗

 

 

벗은 존재의 숙소이다

그 등불이다

그 휴식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먼 내일에의 여행

그 저린 뜨거운 눈물이다

그 손짓이다

오늘 이 아타미 해변

태양의 화석처럼

우리들 모여

어제를 이야기하며 오늘을 나눈다

그리고, 또

내일 뜬다

 

 


 

 

조병화 시인 / 사랑의 계절

 

 

해마다 꽃피는 계절이면

산에 들에 하늘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와 같이 집을 짓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어라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 아물아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매달려

 

한동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구름 끝에

그 누구와 같이 둥지를 치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둥, 둥, 떠가고 싶은 마음

 

아, 해마다 꽃돋는 나날이면

내 마음에 돋는 너의 봉오리.

 

 


 

 

조병화 시인 / 황홀한 모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 훗날 슬픔을 주는것을,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는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 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리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조병화 시인 / 기다림은 아련히

 

 

이제,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인생의 겨울로 접어들면서

기다림은 먼 소식처럼 아련해지며

 

맑게 보다 맑게

가볍게 보다 가볍게

엷게 보다 엷게

부담 없이 보다 부담 없이

스쳐 가는 바람처럼 가물가물하여라

 

긴 생애가 기다리는 세월

기다리면서 기다리던 것을 보내며

기다리던 것을 보내면 다시 기다리며

다시 기다리던 것을 다시 보내면

다시 또다시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어라, 하면서

이 인생의 겨울 저녁 노을

노을이 차가워라

 

기다릴 것도 없이 기다려지는 거

기다려져도 아련한 이 기다림

노을진 겨울이거늘

 

아, 사랑아

 

인생이 이러한 것이어라.

기다림이 이러한 것이어라

 

 


 

 

조병화 시인 / 나 돌아간 흔적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아시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 벌레 새끼치는 자리에

태어나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아 세상 수 만리 나 찾아 왔습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 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러

나 찾아 왔습니다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