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 / 새아침에
모든 것이 뒤바뀌어 질서를 잃을지라도 성진(星辰)의 운행만은 변하지 않는 법도를 지니나니 또 삼백예순날이 다 가고 사람 사는 땅 위에 새해 새아침이 열려오누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영겁(永劫)의 둘레를 뉘라서 짐짓 한 토막 짤라 새해 첫날이라 이름지었던가.
뜻 두고 이루지 못하는 恨은 태초 이래로 있었나보다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워 스스로를 채찍질하라고 그 불퇴전의 결의를 위하여 새아침은 오는가.
낡은 것과 새것을 의와 불의를 삶과 죽음을 ㅡ 그것만을 생각하다가 또 삼백예순날은 가리라 굽이치는 산맥 위에 보랏빛 하늘이 열리듯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 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 꿈이여!
조지훈 시인 / 암혈(岩穴)의 노래
야위면 야윌수록 살찌는 혼(魂)
별과 달이 부서진 샘물을 마신다.
젊음이 내게 준 서릿발 칼을 맞고
創痍를 어루만지며 내 홀로 쫓겨 왔으나
세상에 남은 보람이 오히려 크기에
풀을 뜯으며 나는 우노라
꿈이여 오늘도 광야를 달리거라
깊은 산골에 잎이 진다.
조지훈 시인 / 여인(女人)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릿결에는 새빨간 동백이 핀다.
그대의 파르란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조지훈 시인 / 피리를 불면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萬里 구름길에 鶴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적은 풀잎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데
물 우에 바람이 흐르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어 피리를 불면
꽃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리어
바라뵈는 紫霞山 열두 봉우리
싸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도 운다
조지훈 시인 / 행복론 (幸福論)
1. 멀리서 보면 寶石인 듯
주워서 보면 돌멩이 같은 것
울면서 찾아갔던 산 너머 저 쪽
2. 아무데도 없다 幸福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 속에 만들어 놓고
혼자서 들여다 보며 가만히 웃음 짓는 것
3. 아아 !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웃으며 돌아온 草家 三間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조지훈 시인 / 호수(湖水)
장독대 위로 흰 달 솟고 새빨간 봉선화 이우는 밤
작은 호수로 가는 길에 호이 호이 휘파람 날려 보다
머리칼 하얀 옷고름 바람이 가져가고
사슴이처럼 향긋한 그림자 따라
산밑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조지훈 시인 / 화체개현(花體開顯)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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