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시인 / 내 마음에 사는 너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리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조병화 시인 /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른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그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덧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조병화 시인 / 산책
참으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앉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다 앉았다 하고 싶은 나무 골목길 분수의 잔디 노란 밀감나무 아래 빈 벤치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누워 있고 싶은 남국의 꽃밭 마냥 세워 푸르기만한 꽃밭 내 마음은 솔개미처럼 양명산 중턱 따스한 하늘에 걸려 날개질 치며 만나다 헤어질 그 사람들이 또 그리워들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영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 앉아 있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조병화 시인 / 자유
공중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공중을 날며 스스로의 모이를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그렇게 공중을 높이 날면서도 지상에 보일까 말까 숨어 있는 모이까지 찾아먹을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아, 그렇게 스스로의 모이를 찾아다니면서 먹어서 되는 모이와 먹어서는 안 되는 모이를 알아차리는 민감한 지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지상을 날아다니면서 내릴 자리와 내려서는 안 될 자리, 머물 곳과 머물러서는 안 될 곳, 있을 때와 있어서는 안 될 때를 가려서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가볍게 먹는 새만이 높이 멀리 자유를 날으리.
조병화 시인 / 하나의 꿈인 듯이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잎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랭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냇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 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이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 하는 것은
가시는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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