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조병화 시인 / 내 마음에 사는 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2. 18.

조병화 시인 / 내 마음에 사는 너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리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조병화 시인 /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른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그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덧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조병화 시인 / 산책

 

 

참으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앉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다 앉았다 하고 싶은

나무 골목길 분수의 잔디

노란 밀감나무 아래 빈 벤치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누워 있고 싶은 남국의 꽃밭

마냥 세워 푸르기만한 꽃밭

내 마음은 솔개미처럼 양명산 중턱

따스한 하늘에 걸려 날개질 치며

만나다 헤어질 그 사람들이 또 그리워들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영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 앉아 있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조병화 시인 / 자유

 

 

공중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공중을 날며 스스로의 모이를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그렇게 공중을 높이 날면서도

지상에 보일까 말까 숨어 있는 모이까지

찾아먹을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아, 그렇게

스스로의 모이를 찾아다니면서

먹어서 되는 모이와

먹어서는 안 되는 모이를 알아차리는

민감한 지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지상을 날아다니면서

내릴 자리와 내려서는 안 될 자리,

머물 곳과 머물러서는 안 될 곳,

있을 때와 있어서는 안 될 때를

가려서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가볍게 먹는 새만이

높이 멀리 자유를 날으리.

 

 


 

 

조병화 시인 / 하나의 꿈인 듯이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잎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랭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냇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 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이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 하는 것은

 

가시는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병화(趙炳華) 시인 /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 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해서 시집을 발표,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 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쉬운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 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 원상 및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 시론 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