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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지훈 시인 / 새아침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2. 16.

조지훈 시인 / 새아침에

 

 

모든 것이 뒤바뀌어 질서를 잃을지라도

성진(星辰)의 운행만은 변하지 않는 법도를 지니나니

또 삼백예순날이 다 가고 사람 사는 땅 위에

새해 새아침이 열려오누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영겁(永劫)의 둘레를

뉘라서 짐짓 한 토막 짤라

새해 첫날이라 이름지었던가.

 

뜻 두고 이루지 못하는 恨은

태초 이래로 있었나보다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워

스스로를 채찍질하라고

그 불퇴전의 결의를 위하여

새아침은 오는가.

 

낡은 것과 새것을 의와 불의를

삶과 죽음을 ㅡ

그것만을 생각하다가 또 삼백예순날은 가리라

굽이치는 산맥 위에 보랏빛 하늘이 열리듯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

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

꿈이여!

 

 


 

 

조지훈 시인 / 암혈(岩穴)의 노래

 

 

야위면 야윌수록

살찌는 혼(魂)

 

별과 달이 부서진

샘물을 마신다.

 

젊음이 내게 준

서릿발 칼을 맞고

 

創痍를 어루만지며

내 홀로 쫓겨 왔으나

 

세상에 남은 보람이

오히려 크기에

 

풀을 뜯으며

나는 우노라

 

꿈이여 오늘도

광야를 달리거라

 

깊은 산골에

잎이 진다.

 

 


 

 

조지훈 시인 / 여인(女人)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릿결에는

새빨간 동백이 핀다.

 

그대의 파르란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조지훈 시인 / 피리를 불면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萬里 구름길에

鶴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적은 풀잎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데

 

물 우에 바람이

흐르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어

피리를 불면

 

꽃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리어

 

바라뵈는 紫霞山

열두 봉우리

 

싸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도 운다

 

 


 

 

조지훈 시인 / 행복론 (幸福論)

 

 

1.

멀리서 보면

寶石인 듯

 

주워서 보면

돌멩이 같은 것

 

울면서 찾아갔던

산 너머 저 쪽

 

2.

아무데도 없다

幸福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 속에 만들어 놓고

 

혼자서 들여다 보며

가만히 웃음 짓는 것

 

3.

아아 !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웃으며 돌아온

草家 三間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조지훈 시인 / 호수(湖水)

 

 

장독대 위로 흰 달 솟고

새빨간 봉선화 이우는 밤

 

작은 호수로 가는 길에

호이 호이 휘파람 날려 보다

 

머리칼 하얀 옷고름

바람이 가져가고

 

사슴이처럼 향긋한

그림자 따라

 

산밑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조지훈 시인 / 화체개현(花體開顯)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조지훈(趙芝薰) 시인 / 1920∼1968

본명은 동탁(東卓). 지훈은 호. 경북 영양에서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독학으로 검정 고시에 합격한 후 혜화 전문 학교 문과를 졸업. 광복 후 조선 문화 건설 협회 회원. 사망 때까지 고려대 교수로 재직. 1939년에 <문장>지에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1946년에 동기생인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하여 이후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움. 1957년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 1962년 고려대 민족 문화 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 문화사 대계>를 기획, <한국 문화사 시설> <신라 가요 연구 논고> <한국 민족 운동사>등의 논조를 남겼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남. 시집으로 <풀잎 단장>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등과 수필, 평론집으로 <창에 기대어> <시와 인생> <돌의 미학>, 역서로 <채담>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