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시인 / 새해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피천득 시인 / 시월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피천득 시인 / 어떤 유화
오래 된 유화가 갈라져 깔렸던 색채가 솟아오른다
지워 버린 지워 버린 그 그림의
피천득 시인 / 연정
따스한 차 한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한 것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한 것 잠깐 들렀던 도시와 같이 어쩌다 생각나는 것
피천득 시인 / 오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피천득 시인 / 우정
등덩굴 트레이스 밑에 있는 세사발 손을 세사 속에 넣으면 물기가 있어 차가웠다. 왼손이 들어있는 세사위를 바른 손바닥으로 두들기다가 왼손을 가만히 빼내면 두꺼비집이 모래 속에 작은 토굴같이 파진다. 손에 묻은 모래가 내 눈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제 입을 내 눈에 갖다대고 불어주느라고 애를 썼다.
한참 그러다가 제 손가락에 묻었던 모래가 내 눈으로 더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영이도 울었다. 둘이서 울었다. 어느 날 나는 영이 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파진다고 그랬다. "그래 그래" 하고 영이는 반가워하였다. 그때같이 영이가 좋은 때는 없었다.
피천득 시인 / 이 순간
이 순간 내가 별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주 시인 / 밤이 깊으면 외 8편 (0) | 2021.02.22 |
---|---|
서정주 시인 / 가을비 소리 외 8편 (0) | 2021.02.21 |
피천득 시인 / 너는 아니다 외 5편 (0) | 2021.02.19 |
조병화 시인 / 내 마음에 사는 너 외 4편 (0) | 2021.02.18 |
조병화 시인 / 후조 외 5편 (0) | 2021.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