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가을비 소리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2. 21.

서정주 시인 / 가을비 소리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서정주 시인 / 가을에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低俗저속에 抗拒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잎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雁行안행-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菊花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白露백로는 霜降상강으로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즘어진 구름은  

이제는 楊貴妃양귀비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開闢개벽은 또 한번 뒷門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서정주 시인 / 곶감 이야기

 

 

맨드래미 물드리신 무명 핫저고리에,

핫보선에, 꽃다님에, 나막신 신고  

감나무집 할머니께 세배를 갔네.

곶감이 먹고싶어 세배를 갔네.

그 할머니 눈창은 고추장 빛이신데  

그래도 절을 하면 곶감 한개는 주었네.  

"그 할머니 눈창이 왜 그리 붉어?"

집에 와서 내 할머니한테 물어보니까

"도깨비 서방을 얻어 살어서 그래"라고  

내 할머니는 내게 말해주셨네.  

"도깨비 서방얻어 호강하는게 찔려서  

쑥국새 솟작새같이 울고만 지낸다더니  

두 눈창자가 그만 그렇게  

고추장빛이 다아 되어 버렸지

 

 


 

 

서정주 시인 / 광화문(光化門)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 - 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

 

상하 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서정주 시인 / 꽃피는 것 기특해라

 

 

봄이 와 햇빛 속에 꽃피는 것 기특해라  

꽃나무에 붉고 흰 꽃 피는 것 기특해라  

눈에 삼삼 어리어 물가으로 가면은  

가슴에도 수부룩히 드리우노니  

봄날에 꽃피는 것 기특하여라.

 

 


 

 

서정주 시인 / 노을

 

 

노들강 물은 서쪽으로 흐르고  

능수 버들엔 바람이 흐르고

 

새로 꽃이 핀 들길에 서서  

눈물 뿌리며 이별을 허는  

우리 머리 우에선 구름이 흐르고

 

붉은 두볼도  

헐덕이든 숨결도

사랑도 맹세도 모두 흐르고

 

나무 ㅅ닢 지는 가을 황혼에

홀로 봐야할 연지 ㅅ빛 노을.

 

 


 

 

서정주 시인 / 눈물나네

 

 

눈물 나네 눈물 나네

눈물이 다 나오시네.

이 서울 하늘에

오랜만에 흰 구름 보니

눈물이 다 나오시네.

 

이틀의 연휴에

공장 쉬고

차 빠져나가

이 서울 하늘에도

참 오랜만에

검은 구름 걷히고

흰 구름이 떠보이니

두 눈에서

눈물이 다 나오시네.

 

 


 

 

서정주 시인 / 늙은 사내의 詩

 

 

내 나이 80을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깍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깍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깍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은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달래자  

마음달래자 마음달래자

 

 


 

 

서정주 시인 / 모란 그늘의 돌

 

 

저녁 술참  

모란 그늘  

돗자리에 선잠 깨니  

바다에 밀물  

어느새 턱 아래 밀려와서  

가고 말자고  

그 떫은 꼬투리를 흔들고,

내가 들다가  

놓아 둔 돌  

들다가 무거워 놓아 둔 돌  

마저 들어 올리고  

가겠다고  

나는 머리를 가로 젓고 있나니......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