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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시의 맛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9.

김현승 시인 / 시의 맛

 

 

멋진 날들을 놓아두고

시를 쓴다.

고궁(古宮)엔 벗꽃,

그늘엔 괴인 술,

멋진 날들을 그대로 두고

시를 쓴다.

 

내가 시를 쓸 때

이 땅은 나의 작은 섬,

별들은 오히려 큰 나라.

 

멋진 약속을 깨뜨리고

시를 쓴다.

종아리가 곧은 나의 사람을

태평로 2가 프라스틱 지붕 아래서

온종일 기다리게 두고,

나는 호올로 시를쓴다.

 

아무도 모를 마음의 빈 들

허물어진 돌가에 앉아,

썪은 모과 껍질에다 코라도 부비며

내가 시를 쓸 때,

나는 세계의 집 잃은 아이

나는 이 세상의 참된 어버이.

내가 시를 쓸 땐

 

멋진 너희들의 사랑엔

강원도풍(江原道風)의 어둔 눈이 나리고,

내 영혼의 벗들인 말들은

까아만 비로도 방석에 누운

아프리카산(産) 최근의 보석처럼

눈을 뜬다.

빛나는 눈을 뜬다.

 

 


 

 

김현승 시인 / 행복의 얼굴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김현승 시인 / 고독한 이유

 

 

고독은 정직하다

고독은 신을 만들지 않고

고독은 무한의 누룩으로

부풀지 않는다

 

고독은 자유다

고독은 군중 속에 갇히지 않고

고독은 군중의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고독은 마침내 목적이다

고독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고독은 목적 밖의 목적이다

목적 위의 목적이다

 

 


 

 

김현승 시인 / 절대신앙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김현승 시인 / 오월의 환희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그늘,

밝음에 너는 옷을 입혔구나

우리도 일일이 형상을 들어

때로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이 밝은, 이 빛은

채울 대로 가득히 채우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구나

그늘 - 너에게서...

 

내 아버지의 집

풍성한 대지의 원탁마다

그늘,

오월의 새 술을 가득 부어라!

 

이깔나무 - 네 이름 아래

나의 고단한 꿈을 한 때나마 쉬어가리니...

 

 


 

 

김현승 시인 / 내일

 

 

나는 이렇게 내일을 맞으련다.

모든 것을 실패에게 주고,

비방은 원수에게,

사랑은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에게......

 

나의 잔에는

천년의 어제보다 명일(明日)의 하루를

넘치게 하라.

 

내일은 언제나 내게는 축제의 날,

꽃이 없으면 웃음을 들고 가더래도.......

 

내일,

오랜 역사보다도

내일만이 진정 우리가 피고 가는

풍성한 흙이 아니냐?

 

 


 

 

김현승 시인 / 창

 

 

창을 사랑한다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십이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김현승 시인(金顯承, 1913년~1975년)

1913년 전남 광주 출생. 호는 다형(茶兄)·남풍(南風).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1934년 시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때 당신들은>이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옴. 저서: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1973. 서울특별시문화상 수상. 문예 동인지 신문학 발행. 한국문학가협회 상임위원. 숭전대학교 문리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