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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연(鉛)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10.

김현승 시인 / 연(鉛)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

 

맑고 고요한 내 눈물을

밤이슬처럼 맺혀보아도,

눈물은 나를 떼어낸 조그만 납덩이가 되고 만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나의 시를 써보지만,

울리지 않는다. - 금과 은과 같이는

 

나를 만지는 네 손도 무거울 것이다.

나를 때리는 네 주먹도

시원치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음성

나의 눈빛

 

내 기침소리마저도

나를 무겁게 한다.

 

내 속에는 아마도

납덩이가 들어 있나부다,

나는 납을 삼켰나부다,

나는 내 영혼인 줄 알고 그만 납을

삼켜버렸나부다.

 

 


 

 

김현승 시인 / 오월의 그늘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그늘.

밝음에 너는 옷을 입혔구나

우리도 일일이 형상을 들어

때로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이 밝음. 이 빛은

채울대로 가득히 채우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구나.

그늘....너에게서.

 

내 아버지의 집

풍성한 대지의 원탁마다

그늘.

오월의 새 술들 가득 부어라

 

이팝나무 네 이름 아래

나의 고단한 꿈을 한때나마 쉬어가리니

 

 


 

 

김현승 시인 / 밤은 영양이 풍부하다

 

 

 무르익은

 과실의 密度와 같이

 밤의 내부는 달도록 고요하다.

 

 잠든 내 어린것들의 숨소리는

 작은 벌레와 같이

 이 고요 속에 파묻히고,

 

 별들은 나와

 自然의 구조에

 질서있게 못을 박는다.

 

 한 시대 안에는 밤과 같이 解體나 分析에는

 차라리 무디고 어두운 시인들이 산다.

 그리하여 토의의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

 밤은 상상으로 저들의 나래를 이끌어 준다.

 

 꽃들은 떨어져 열매 속에

 그 화려한 자태를 감추듯······

 

 그리하여 시간으로 하여금

 새벽을 향하여

 이 풍성한 밤의 껍질을

 서서히 탈피케 할 줄을 안다

 

 


 

 

김현승 시인 / 시인들은 무엇하러 있는가

 

 

슬픔을 기쁨으로

그들의 꿈으로써 바꾸기 위하여

그 기쁨을 어린 아이보다

더 기뻐하기 위하여

 

그들은 가장 춥고

그들은 가장 뜨겁게 있다.

 

시인들은 무엇하러 있는가

그들은 땅속에 묻힌 황금잎보다도

그들은 저 하늘 위의 별을 찾으며

무엇하러 있는가

 

그들은 소리로써 노래하지만

그들은 말로써

침울하고 듣기 위하여 있다.

 

겨울에는 마지막 잎새로

봄에는 또한 첫눈으로 터지면서…

 

 


 

 

김현승 시인 / 책과의 여행

 

 

가장 고요할 때

가장 외로울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밤하늘에서 별을 찾듯 책을 연다

보석상자의 뚜껑을 열듯 조심스러이 연다

 

가장 기쁠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나와 같이 그 기쁨을 노래할 영혼의 친구들을

나의 행복을 미리 노래하고 간 나의 친구들을 거기서 만난다

아,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주택들

아, 가장 높은 정신의 성(城)들

그리고 가장 거룩한 영혼의 무덤들

그들의 일생은 거기에 묻혀 있다

나의 슬픔과 나의 괴롬과 나의 희망을 노래하여 주는

내 친구들의 썩지 않는 영혼을 나는 거기서 만난다

그리고 힘주어 손을 잡는다

 

 


 

 

김현승 시인 / 나는 언제나 구체적이다

 

 

만일 세계의 껍질 속에서 나를 잃어버린다면

이 가난한 수확을 거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추상(抽象)의 가없는 주변과 사랑이 빠져나간

연인들의 알뜰한 살결일 뿐.

 

한 시대의 긴밀한 구조를 위하여

한 나라의 불행을 막기 위하여

하나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낡은 가풍(家風)과 같은 의좋은 이름들은

나를 버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상실(喪失)과 전쟁(戰爭)은 어느 의미에선 의좋은 자매이다.

 

시간에 못 박힌 나의 비좁은 골짜기 안에서

나의 벌거숭이는 미지의 홧살*을 피하여 지금

벌레와 같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연의 품 – 어느 유구한 이름 아래에도

나의 몸을 숨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상(偶像) - 그것은 추상(抽象)의 신(神)이다, 무중력의 공간과 같은.

 

나의 피와 살이다!

어느 풍만한 가슴에 오롯이 빛나는 보석이든가,

어느 팽팽한 옆구리에 사무쳐 박히는 창끝이든가,

어떻든 나는 참다운 시와 같이 언제나 구체적이다!

나는 감동이다!

 

만일 세계의 의상 속에서 나를 잃는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죽는 것일까?

존귀한 것은 생명의 창조이다,

그러나 생명이란 그 절정에 일어선 자다!

그것은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구체적일 뿐.

 

나를 버리라고 의좋은 이름들은 속삭인다,

그러나 추상(抽象)의 너그러움과 형식의 아름다움은

다소곳이 사는 허약한 자매이다,

이 가없는 바다 – 썰물에 녹아 스며들고 마는

나는 달콤한 설탕인가 아직도 감미론 소년인가

 

* 문법에는 ‘화살’이 맞지만, 시집에 ‘홧살’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김현승, 『김현승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년, 296~297쪽

 

 


 

김현승 시인(金顯承, 1913년~1975년)

1913년 전남 광주 출생. 호는 다형(茶兄)·남풍(南風).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1934년 시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때 당신들은>이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옴. 저서: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1973. 서울특별시문화상 수상. 문예 동인지 신문학 발행. 한국문학가협회 상임위원. 숭전대학교 문리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