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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밤이 깊으면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2. 22.

서정주 시인 / 밤이 깊으면

 

 

밤이 깊으면 淑숙아 너를 생각한다. 달래마눌같이 쬐그만 淑숙아  

너의 全身전신을,

낭자언저리, 눈언저리, 코언저리, 허리언저리,

키와 머리털과 목아지의 기럭시를  

유난히도 가늘든 그 목아지의 기럭시를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서러운 음성을

 

서러운서러운 옛날말로 우름우는 한마리의 버꾸기새.

그굳은 바윗속에, 황土황토밭우에,

고이는 우물물과 낡은時計시계ㅅ소리 時計의 바늘소리  

허무러진 돌무덱이우에 어머니의時體시체우에 부어오른 네 눈망울우에  

빠앍안 노을을남기우며 해는 날마닥 떳다가는 떠러지고  

오직 한결 어둠만이적시우는 너의 五藏六腑오장육부. 그러헌 너의 空腹.공복

 

뒤안 솔밭의 솔나무가지를,

거기 감기는 누우런 새끼줄을,

엉기는 먹구름을, 먹구름먹구름속에서 내이름ㅅ字자부르는 소리를,

꽃의 이름처럼연겊어서연겊어서부르는소리를,

혹은 그러헌 너의 絶命절명을

 

 


 

 

서정주 시인 / 뻐꾸기는 섬을 만들고

 

 

뻐꾸기는  

강을 만들고,

나루터를 만들고,

 

우리와 제일 가까운 것들은  

나룻배에 태워서 저켠으로 보낸다.

 

뻐꾸기는  

섬을 만들고,

이쁜 것들은  

무엇이든 모두 섬을 만들고,

 

그 섬에단 그렇지  

백일홍 꽃나무 하나 심어서  

먹기와의 빈 절간을......

 

그러고는 그 섬들을 모조리  

바닷속으로 가라앉힌다.

만 길 바닷속으로 가라앉히곤  

다시 끌어올려 백일홍이나 한 번 피우고  

또다시 바닷속으로 가라앉힌다.

 

 


 

 

서정주 시인 / 소곡(小曲)

 

 

뭐라 하느냐  

너무 앞에서  

아- 미치게  

짓푸른 하눌.

 

나, 항상 나,

배도 안고파  

발돋음 하고  

돌이 되는데.

 

 


 

 

서정주 시인 / 시월이라 상달되니

 

 

어머님이 끊여 주던 뜨시한 숭늉,

은근하고 구수하던 그 숭늉 냄새.

시월이라 상달되니 더 안 잊히네.

평양에 둔 아우 생각 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안 잊히네, 영 안 잊히네.

 

고추장에 햇쌀밥을 맵게 비벼 먹어도,

다모토리 쐬주로 마음 도배를 해도,

하누님께 단군님께 꿇어 업드려  

미안하요 미안하요 암만 빌어도,

하늘 너무 밝으니 영 안 잊히네.

 

 


 

 

서정주 시인 / 입맞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 사랑의 石榴석류꽃 낭기 낭기  

하누바람 이랑 별이 모다 웃습네요  

풋풋한 山노루떼 언덕마다 한마릿식  

개고리는 개고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구비 江물은 西天으로 흘러 나려...

 

땅에 긴 긴 입마춤은 오오 몸서리친  

쑥니풀 지근지근 니빨이 히허여케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 달드라 우름가치 달드라.

 

 


 

 

서정주 시인 / 첫사랑의 시(詩)

 

 

초등학교 3학년때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해서요.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깍고,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국화밑에 놓아 두곤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

 

 


 

 

서정주 시인 / 편지

 

 

내 어릴 때의 친구 淳實이.

생각하는가  

아침 山골에 새로 나와 밀리는 밀물살 같던  

우리들의 어린 날,

거기에 매어 띄웠던 그네(추韆)의 그리움을?

 

그리고 淳實이.

시방도 당신은 가지고 있을 테지?

연약하나마 길 가득턴 그 때 그 우리의 사랑을.

 

그 뒤,

가냘픈 날개의 나비처럼 헤매 다닌 나는  

산나무에도 더러 앉았지만,

많이는 죽은 나무와 진펄에 날아 앉아서 지내왔다.

 

淳實이.

이제는 주름살도 꽤 많이 가졌을 淳實이.

그 잠자리같이 잘 비치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시방은 어느 모래 沙場에 앉아 그 소슬한 翡翠의 별빛을 펴는가.

 

죽은 나무에도 산 나무에도 거의 다 앉아 왔거든  

난들에도 구렁에도 거의 다 앉아 왔거든  

이젠 자네와 내 주름살만큼이나 많은 그 골진 사랑의 떼들을 데리고  

우리 어린날같이 다시 만나세.

갓트인 蓮봉우리에 낮 미린내도 실었던  

우리들의 어린날같이 다시 만나세.

 

 


 

 

서정주 시인 / 가벼히

 

 

애인이여

너를 만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사이

절깐을 짓더래도

가벼히 한눈 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한다.

 

 


 

 

서정주 시인 / 질마재의 노래

 

 

세상 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