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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피천득 시인 / 너는 아니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2. 19.

피천득 시인 / 너는 아니다

 

 

너같이 영민하고

너같이 순수하고

 

너보다 가여운

너보다 좀 가여운

 

그런 여인이 있어

어덴가에 있어

 

네가 나를 만나게 되듯이

그를 내가 만난다 해도

 

그 여인은

너는 아니다

 

 


 

 

피천득 시인 / 너는 이제

 

 

너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도 고독도 그 어떤 눈길도

 

너는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조그마한 안정을 얻기 위하여 견디어 온 모든 타협을.

 

고요히 누워서 네가 지금 가는 곳에는

너같이 순한 사람들과 이제는 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다.

 

 


 

 

피천득 시인 / 노 젓는 소리

 

 

달밤에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

 

만나러 가는 배인가

만나고 오는 배인가

 

느린 노 젓는 소리

만나고 오는 배겠지

 

 


 

 

피천득 시인 / 눈물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가나 아니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피천득 시인 / 단풍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핏빛 저 산을 보고 살으렸더니

석양에 불붙는 나뭇잎같이 살으렸더니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바람에 불려서 떨어지오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지오

 

 


 

 

피천득 시인 / 부활절에 드리는 기도

 

 

이 성스러운 부활절에

저희들의 믿음이

부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그 마음이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권력과 부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그 힘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피천득(皮千得. 1910 ~ 2007) 시인

수필가, 시인, 영문학자. 서울 출생. 호는 금아(琴兒). 상해 호강대학교(University of Shanghai) 영문과를 졸업.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抒情小曲)'을 발표하여 등단. 간결하고 섬세한 문체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느낀 감정을 순수하고 서정적으로 그려 낸 작품을 많이 창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수필집 "인연", "금아 문선", 시집에 "서정 시집", "금아 시문선", "산호와 진주"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경성대학 예과교수를 거쳐 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하였으며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대학교 대학원 주임교수를 지냈다. 1991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1995 제9회 인촌상 (문학부문). 1999 제9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