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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옥 시인 / 길이 끝나는 곳 외 1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28.

이길옥 시인 / 길이 끝나는 곳

 

 

꼬였다 풀리고

풀렸다 엉킨다.

 

흩어졌다 모이고

뭉쳤다 갈라진다.

 

길은 그렇게

나를 끌고 다니면서

애를 태우고 논다.

 

외길이어도

가파른 오르막길이어도

험난한 가시밭길이어도

선택의 자유를 빼앗긴 길

 

우화등선 운명을 뒤집고

멋대로 데리고 즐기다

싹둑 잘라 확 내팽개친 길

 

화끈거리는 통증 식어

관심 접은

그래서 조용히

조용히 가라앉는 길

 

 


 

 

이길옥 시인 / 꽃의 울음

 

 

새벽 산행에 들면

길가에 울고 있는 작은 꽃들을 볼 수 있다.

 

꽃의 얼굴에 촉촉이 맺혀 있는

눈물

방울

그들이 밤새 운 것이다.

 

남들은 꽃이 웃는다고 하는데

나는

새벽 산행에서 꽃이 우는 것을 보았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그래서 관심 밖에 난

그 설음의 눈물에

발길이 잡힌다.

 

가끔

눈물이 말랐을 때

그때

웃음이라 여길 뿐

 

이유 없는 꽃의 슬픔에 빨려

새벽 산행이 더디다.

 

 


 

 

이길옥 시인 / 나도 모르겠어요

 

 

당신도

가끔

될 듯 될 듯싶은데

안 되는 때 있었나요.

 

당신도

때로는

가슴 찢어지고 속 뒤집히는 일

당해본 일 있었나요.

 

당신도

언젠가

마음 심란해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싶고

보이는 대로 짓이겨 뭉개고 싶은 때

있었나요.

 

당신도

한번 쯤

맥 빠져 김새고

풀 죽어 가라앉은 때

있었나요.

 

그러데 말이죠.

사는 게

다 그렇다 하네요.

 

나도 모르겠어요.

 

 


 

 

이길옥 시인 / 나를 있게 한 이유를 알고 보니

 

 

나는 화산을 품에 담은 불만 덩어리다.

그 재미로 산다.

하루라도 그냥 넘기면

어딘가 빈 것 같고 허전하여 미친다.

오금이 저리고

온몸에 불안의 돌기가 돋아 움질거린다.

 

괜한 트집으로 심장이 열 올라

선홍을 펌프질할 때마다

나는 들뜨고

쾌락의 아우성에 어울려 막춤에 신명난다.

신명나는 춤사위에 휘말린 트집이

죽순처럼 돋아 하늘을 찌른다.

찔린 하늘이 푸르게 멍이 든다.

그런 나를 남들은

투사라고 했다가 머저리라 했다가 갖고 논다.

 

가끔은 이해를 하다가도 비위 틀리면

용서를 거두고 칼을 간다.

칼에서 번득이는 살기가 회오리칠 때

혈육도 짓밟고 일어서는 불신과 오만이 기죽고

이슬에도 무너지는 부실공사장의 양심이

쓰다 남은 모래알처럼 힘을 잃고 허물어진다.

 

내 혀는 가시다.

가시에 찔린 종기가 샛노란 농을 감싸 안고 달아난다.

새살이 돋을 것이다.

 

내 눈에 찍힌 非行들이

하나씩 해체되어 무릎을 꿇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이길옥 시인 / 나만의 꿈

 

 

 

남들은 보잘 것 없어도

내게는 희망이다.

 

너무 넘치지 않게

아무리 작아도

내 살만큼만 있으면 족하다.

 

걱정이 없으면 그만이다.

 

건강하게

화목하게

웃음 넘치면 된다.

 

아침마다 이슬 받고

청초히 새로 웃는 들꽃의

포근한 마음을 빌려다

욕심 없이 살고 싶다.

 

많으면 많은 만큼

넘치면 넘친 만큼

근심도 크다.

 

그냥 보잘 것 없어도

이름 하나 못 남겨도

남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면 족하다.

 

 


 

 

이길옥 시인 / 나비 죄를 보상하다

 

 

날개로 밀리는 바람을 숨죽여

사뿐 꽃술을 밟고

우화 이전의 뼈 없는 삶을 들여다본다.

 

사각사각

새순으로 입맛 길들여진 나날이

네댓 번의 탈피로 날개를 달기까지

허락 없이 먹어치운 죄

보상의 길 찾아들었던 하안거 끝내고

새로운 생을 재단하는 나비

 

유충 시절 이빨 자국이 만든 상처의 구멍으로

아픔을 흘려보내며 피워낸 꽃이 미안해

조심조심 다가가 눈치를 살핀다.

 

행여 다칠 새라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망설임에

떨리는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교감을

상처 없이 마무리한 나비가

말았던 대롱 입을 풀어 꿀맛에 녹아든다.

 

죄 값을 홀가분하게 마무리한 날갯짓이 가뿐하다.

 

 


 

 

이길옥 시인 / 낙엽에 붙여

 

 

태양의 둘레에서 시들은

한 잎 낙엽이

내 발밑에 떨어지던 날

 

나는 관용의 껍데길 벗고

그 낙엽을 주워

곱게 책갈피에 넣어 접었다.

 

얼마 뒤

나는 낙엽과의 대화에서

그의 숱한 내력을 들었다.

 

풋풋한 속살로 살쪄 오른

몇 개의 허벅지를 가꾸던

풍요의 한 철을

무리 없이 살다가 만

마음으로 통하는 섭리와

 

꼭은 가야 할

이유도 없이

우둔한 얼굴에 색칠하며

순수의 정감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오늘 슬프다는 것.

 

손거울의 외곽에서

어둠을 예감하는 눈빛과 함께

생각을 잊은 그림자 같이

이별의 악수를 느꼈을 때

 

풍경을 타고 흐르던 아픔에서

영원을 내 걸던

낙엽은 이제 하늘이 부름을 받았다.

스스로 일어서는 힘을 얻었다.

 

 


 

 

이길옥 시인 / 날개

 

 

잠에서 돌아와

세숫대야에 퍼 올린

정화수 한 모금을 얼굴에 바르면

아침이

무수한 빛을 더불어 날개를 단다.

 

한밤 내

수시로 일던

꿈의 날개들이

아예

아침을 접하고 있다.

 

훨훨

떠날 수 있으므로

날개는

언제나 나의 꿈으로 커서

내 안 깊숙이 고인

인고의 발바닥을

달콤하게 핥고 있다.

 

아침을 담아온

정화수 가득

빛의 날개들이

얼굴을 간질이며 비상(飛翔)의 꿈을 꾸고 있다.

 

 


 

 

이길옥 시인 / 낡은 골목

 

 

  개발이 늦은 매곡동 허름한 뒷골목은

  그늘이 검은 스타킹을 신고

  소형 모닝의 출근을 방해하기 일쑤예요.

 

  길잡이가 서툰 소나타가 발을 잘못

  들여놓고 제 몸에 깊은 상처를 낸 뒤

  끓는 부아의 음계를 높여 오열하는 것은

  가끔 이웃 할머니들의 말다툼에

  오염된 것일거예요.

 

  억지 춘향이 옷 걸치고 짜증 앞세운

  동장님의 현장답사로 사탕을 얻어먹은

  주민들의 시간이 푸석푸석 말라가는

  동안 바닥의 살점들은 뜯겨나가

  뼈대가 드러나고‘반공방첩’

  색 바랜 페인트의 오랜 기억으로 버틴

  시멘트블록의 몸통이 위험을 느끼는 담장을

  아픈 골목이 간신히 붙잡고 있어요.

 

  가난이 둘러앉아 대책을 논하는

  나른한 봄날 오후 허름한 담벼락에

  턱을 괴고 겨울을 위태롭게 견딘

  포도나무 마른 덩굴이 뿌리로부터

  봄소식을 전해 듣고 겨울눈의

  눈곱을 떼고있어요.

 

  개발 소식 감감한 매곡동 낡은 골목을

  점령한 어둠이 허리 꺾인 전신주를 보듬고

  알몸인 열등을 깔고 노숙을 하는 동안

  떠나지 못한 고샅 할머니들 입에서

  썩은 냄새에 튀겨진 욕만

  툭툭 터지고 있어요.

 

 


 

 

이길옥 시인 / 낮은 곳이 좋다

 

 

깎아지른 절벽 끝에 올라 발밑을 보라

오금이 저린다.

아슬아슬 발바닥이 간지럽다.

 

어릴 적

객기에 핏대 세워 강변 미루나무를 타고 올라

참매미 잡으려던 기지 휘어지며 낭창거릴 때

콩알만 해진 간덩이가 넘실대는 강물에 시퍼렇게 물들어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해 쩔쩔매며 땀에 젖던

그 어릴 적

 

오른다는 건

높이 오른다는 건 위험한 짓이라고

어릴 적 그때부터 귀에 가득 차 넘치게 들었다.

 

세상 물정에 척척하게 젖으면서부터 높이 올랐던 것들

떨어지지 않는 것 보지 못했다.

 

이승만은 쫓겨 내려왔고

박영석은 스스로 산에서 내려왔다.

 

높이 오르지 않아 떨어질 염려 없어 좋다는 것

바람 덜 타고

관심 털어낸 자리

낮아야 안전지대라는 것

어릴 적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배웠다.

 

 


 

 

이길옥 시인 / 내가 사랑하는 것

 

 

삼단 같은 머리에 쪽물들이고

반달 같은 눈썹

앵두 같은 입술

솜털 같은 얼굴에 분 바른다고

마음까지 예뻐지는 것 아니더라.

 

눈(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예쁜 얼굴, 고운 자태 보다

내가 더 사랑하는 것은

조금은 빠지더라도

넉넉한 여유로 자기를 버리는

따뜻한 품으로 서로를 감싸안는

용서와 관용,

봉사와 희생,

배려와 사랑이 살고 있는

고운 마음 바로 그것이다.

 

 


 

 

이길옥 시인 /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

 

 

깊숙이 패인 살점 안에 돋아나는 진통이

어두운 밤의 외곽을 선회하며

불면의 동공에 세심한 관심을 쑤셔 넣고

순백의 마음속에 깨끗이 닦인 거울을 비추는

자정(子正)의 꿈.

나는 꿈의 파편에 묻힌 채

백팔번뇌(百八煩惱)를 헐기에 바쁜 손마디에 생긴 물집을 짜며

머큐로크롬에 흥건히 젖은 솜뭉치를 추겨 든다.

빨간 정념을 흔들어 깨우는 우렛소리.

굳은 사념의 깊은 속살 가닥, 가닥에서

자연의 파란 눈들이 사랑을 염원하고 헤어지던 비명을

줄줄이 엮어

뜨거운 사연으로 환원시키던 원시의 촉수마다

눈이 흐린 안개로 덮이는 지대를 역류하고

내 잘못의 구멍 난 사념이

문득 고열에서 하나씩 돌아오는 시각을

예감하는 지혜로

어둠을 기어오르는 벌레들을 털어 내며

우윳빛 창을 왈칵 밀어젖힌다.

창 너머의 시원스런 공허.

무딘 기억을 흔들어 깨우는 기침 소리가

취한 자정의 역습에서 일어서는 불굴의 투지를 추겨

이마에 손을 짚으면

물결처럼 가닥으로 흐르는 생활의 밝은 여명이 일고

생생한 기력이  잡아끄는 동아줄 밖의

침울한 밤, 그 껍데기들의 해체 속에 밝아오는

오, 빛.

내 마음대로 한  아름의 빛이

아침 발목에 걸린 목숨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이 시각의 탯줄을 당기는 작업에 열중한다.

 

 


 

 

이길옥 시인 / 누이야 고향 가자

 

 

봄이 팔팔 끓는 솥뚜껑을 열었나 보다

언덕배기에 모락모락 김이 서린다.

 

누이야

그 김을 우리 아지랑이라 하자.

 

그리고

그 아지랑이를 만나러 고향에 가자.

 

오래전 어릴 적

네 손을 잡고 산과 들을 들쑤시고 다니던 고향

그 고향의 논두렁 밭두렁에 남긴 발자국

지금도 있나

우리 같이 가 찾아보자.

 

누이야

철없던 시절

짓궂은 장난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것들

아직 무사한지 찾아가 확인해보자.

 

찾아가 그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여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를 말끔히 씻고

주름 잡힌 삶의 깊은 골을 용서의 웃음으로 메운 뒤

감사의 마음 듬뿍 쏟아

아지랑이를 다독이고 오자.

 

 


 

 

이길옥 시인 / 다 흐른다

 

 

세월이 나를 끌고 갑니다.

버틸 수 없습니다.

겨룰 수도 없습니다.

힘도 방법도 없어 그냥 끌려갑니다.

 

세월이 내게 말을 합니다.

버텨도 소용없고

겨뤄도 쓸데없는 일이니 그냥

맡겨두고 따라 흐르라 합니다.

 

정지하면 상하고

막으면 썩는다고

흐르면서 익으라 합니다.

 

흐르지 않는 것 있으면 찾아보라 하여

눈 씻고 찾아보았는데

정말 흐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흐르면서 변해가도

대들거나

맞서서 멱살 잡는 일이 없습니다.

 

흐르면서 바뀌어도

덤비거나

달려들어 까탈 부리는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족한 나만

순리와 이치에 반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길옥 시인 / 담쟁이

 

 

햇살에 열 오르면

살며시 눈을 열고 하늘을 끌어들이는

가녀린 생명의 숨결을 본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도 볼 수 없는 성장의 크기, 거기에

모든 꿈 걸어놓고

가파른 벽을 타고 오르는 힘겨운 나날.

 

아무리 가파라도

아무리 높아도

절대 포기 없는 끈기가 얽혀

한 폭 고운 그림이 되기도 하고

 

벽을 붙잡고

담을 타고 오르면서

끈끈한 정으로 가슴을 맞댄 채 서로를 끌어안고

어떤 시련에서도 고난에서도

보호막이 되는 희생의 배려를 낳는다.

 

가끔 허공을 휘젓기도 하고

담벼락 이곳저곳 적당한 터를 더듬어

살며시 손을 짚고 안도하는

위태한 삶을 엮어가지만

절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봉사의 나날

남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산다.

 

 


 

 

이길옥 시인 / 당신이라는 이름

 

 

당신이라는 말속으로 들어가

당신의 뜻을 들여다보니

도사려 앉은 당신 몸에 서기瑞氣가 서린다.

 

그 빛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래서 오리무중인 당신이라는 이름 앞에

가벼운 부유물이었던

 

한 번도

당신의 의중에

관심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변죽만 겉도는 허깨비였던

 

당신이라는 포근한 품안에 둥지 틀지 못하고

무관심의 퉁퉁 불은 허풍으로

한기만 구겨 넣는 불량품이었던

 

당신이라는 이름의 광원에

도금이 되며

등에 짊어진 죄의 무게 내리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육신

버리지 않는 당신의 억척 앞에

퍼뜩 정신 추겨들고 무릎을 꿇는다.

 

 


 

 

이길옥 시인(필명: 돌샘)

1949년 전남 진도 출생. 광주교육대학(국어전공). 1973 통일생활 신춘문예 시부 당선. 2006, 03 자유문예 시 부문 신인상. 교직 40년 퇴직(홍조근정훈장). 2007. 한국문학정신 광주 비엔날레 시화전 대상. 2008, 만다라 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08, 대한 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 2009. 서정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09, 월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월간, 격월간, 계간 등 종합문예지 작품 다수 발표. 광주광역시 문인협회 회원. 광주 시인협회 회원.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 정회원. 시집 - 하늘에서 온 편지. ‘물도 운다’, ‘出漁’ 외 공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