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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백선 시인 / 뚜껑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16.

성백선 시인 / 뚜껑

 

 

오피스텔에서 내려다 본 운니동 기와집들

검은 뚜껑들이 다닥다닥 세월을 덮고 있다

뚜껑을 열면

그늘 쓰고 문명을 피해 들어앉았던

개화 덜 된 세간살이가 비춰지면서

속속들이 차있는 나직한 군상들의 내부가

햇빛에 파르라니 눈 흘길 것 같다

 

뚜껑 속에 잠겨 있는

벽에 걸린 아이 낙서의 표정

마당 가운데 흐르는 수도의 사계절

개집 옆 작은 화분들의 자투리 여유

담장에 널린 이불의 낮과 밤

대문에 세워둔 자전거에 감긴 거리

한 사람당 할당된 시간과 공간이 똘똘 뭉쳐져

제자리에서 굴러가고는

 

세월의 뭉치마다

속도 다른 흔적들이

지워질랑 말랑한 뚜껑엔 다시

리모델링된 비밀번호가 채워지고

내 뚜껑은 24시간 개방돼 있어도

모호한 채 무늬만 내고 있는데

 

어느 날 열린 지붕 아래

테라스가 된 발 밑에서

내 뚜껑 속을 올려다보고 손짓하는

40년 전 상고머리 계집아이가 생경한 건

낮은 곳 앞서 흐른 삶의 기복들도

덮개 안에서는 그만치

출렁거리다 넘치고 싶었나보다

 

 


 

성백선 시인

1965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사이버 문학상》과 계간 《시작》에 〈애어리염낭거미〉외 4편을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시집으로 『분합문』(시학, 2011)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