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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유원 시인 / 백색소음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16.

황유원 시인 / 백색소음

 

 

지우개를 한 번 갖다 댈 때마다

공터가 생겨나고

 

거기 빛이 들어요

 

졸려요

엄마 품에 안기기엔 너무 나이들어버렸으니

말랑말랑한 지우개 가루 만지며

잠이 들까요

 

방금 막 열심히 지운 지우개의 가루는

따스해요

건조기에 넣고 돌린 수건들처럼

 

졸려요 안고 있으면

 

꿈은 여전히 온갖 선과 색채 들로 가득하겠죠

꿈에서도 지우개가 필요할지

꿈에도 몰랐나요

 

몰랐나요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몰라도 돼요

제가 방금 만든 거니까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 같은 생각들이 자꾸 쿵쾅거리며

머릿속을 들락거리는 밤

지우개를 손에 쥐고 잠을 자볼까 봐요

꿈의 한쪽을 하얗게 지워주고 나올까 봐요

 

너무 열심히 지우면 꿈 한쪽이 뜨거워지겠죠

그럼 전 또 집에 불이 난 꿈을 꿀 테죠……

 

괜찮아요

시커메진 곳엔 다시 새 지우개를 갖다 대면 되고

다 타서 재가 된 곳을 위해서라면

지우개를 수백 수천 개라도 사오면 될 테니

 

좋아요 좋아 다 못 지워도 좋아

어차피 다 지울 수 있을 리 없잖아

 

백색은 못 되더라도

어쩌면 백색소음에는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밤새 흰 눈이라도 내린 듯

 

하얗게

 

하얗게

 

 


 

황유원 시인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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