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설희 시인 / 유산(遺産)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17.

박설희 시인 / 유산(遺産)

 

 

시멘트를 껴안고 몇 백 년 가는 나무처럼

옹크린 다리를 양팔로 껴안고 수십 년은 거뜬한

쪼그리고 앉은 사람

 

추위가 닥치기 전

이동해야 할 궁리를 다 해본다

지금은 신혈거시대(新穴居時代)

 

쪼그리고 앉는 것은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유산

 

모태에서부터

언제든 이동할 자세가 돼 있는

집 없는 사람

덩달아 쪼그리고 앉은 살림살이들

 

그늘이 워낙 깊어

온통 환해 보이는 바깥

거느리고 있는 것은

그늘 속 그늘

컴컴한 짐승처럼

 

파이고 쓸려 가파른

한낮의 체위

 

 


 

 

박설희 시인 / 충혈

 

 

거센 바람에 떠밀려 가다 보았다

공중에 멈춘

갈매기 한 마리

 

날개를 힘껏 쫙 펴고

필사적으로 견딘다

깃털마다 부풀리는 바람

 

침묵으로 저항하는

몸뚱이가 부들부들 떨린다

떠밀리면 모든 게 끝이라는 듯

충혈된 몸

 

저 멀리 궁평항 방파제에는

새우깡을 낚아채는 부리들의 묘기로

함성과 웃음이 폭죽처럼 터지는데

날개를 꺾을 듯 몰아치는 바람 속

공중에 닻을 내려

버틴다,

세상의 바람은 다 와보라는

 

그 시선이 뚫어지게 닿은 곳

출렁이며 꿈쩍 않는 바다

잔비늘 낱낱이 온통 불타오르는 바다

 

 


 

박설희 시인

1964년 강원도 속초 출생. 성신여자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3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실천문학, 2008), 『꽃은 바퀴다』가 있음. 사)한국작가회의 회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