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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영옥 시인 / 청둥오리가 있는 연못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17.

배영옥 시인 / 청둥오리가 있는 연못

 

 

   잊었다, 끝이다 단언하지만

   저토록 긴 꼬리를 끌며

   따라오는 파문이 있다

 

   뒤돌아보면 이미

   물결 사이로 숨어버리는……

 

   못은,

   물이랑을 파고드는 흔들림을 알아보고

   제 속에 울음을 새기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못은 점점 더 고요해지고

   깊어진다는 것을

 

   어느 여름 심한 가뭄에

   못이,

   바닥을 드러낼 때

   마침내 보이지 않던 흔적들이 제모습을 드러낼

   바로 그곳,

   청둥오리가 떠나버린 연못

 

 


 

 

배영옥 시인 /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세로 빛살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나를 읽고 있는 소리,

 

 


 

배영옥 시인(1966-2018)

1966년 대구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뭇별이 총총』(실천문학, 2011)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가 있음. '천몽' 동인으로 활동. 2018년 6월11일 지병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