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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옥 시인 / 청둥오리가 있는 연못
잊었다, 끝이다 단언하지만 저토록 긴 꼬리를 끌며 따라오는 파문이 있다
뒤돌아보면 이미 물결 사이로 숨어버리는……
못은, 물이랑을 파고드는 흔들림을 알아보고 제 속에 울음을 새기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못은 점점 더 고요해지고 깊어진다는 것을
어느 여름 심한 가뭄에 못이, 바닥을 드러낼 때 마침내 보이지 않던 흔적들이 제모습을 드러낼 바로 그곳, 청둥오리가 떠나버린 연못
배영옥 시인 /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세로 빛살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나를 읽고 있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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