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경숙 시인 / 이상(李箱)을 필사(筆寫)하다
저녁을 필사할 때 바다는 막 해가 지고 있었다 나의 외출은 노을의 점도에 달려있다 오늘처럼 붉은 하늘이 묽게 퍼지면 배 손님들이 모이고 나는 바다 쪽에서 횟집을 응시하며 기다린다
물빛 원피스 바람을 일으키는 애인은 단체손님을 받느라 휘뚜루마뚜루 횟집 주방을 잘박거린다 발목이 지탱하는 하얀 각도에 비해 너무 많은 빛을 하사한 일몰에 대해 뭉크가 횟감으로 올랐다가 하이데거가 오르며 왁자지껄 떠든다 고상한 낚시꾼 놈들이다
주말의 항구는 숙박을 예견한다 간판 주변으로 반짝이는 꼬마 전구를 세다 아래층에서 신호가 오면 조용히 방을 빠져나온다 이층 나의 방은 새벽 배를 탈 저들에게 내어주고 나는 항구가 잠들기를 기다려 홀 한쪽에서 새우잠을 자다 새벽에야 올라간다
불현듯이나 뜻밖에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가끔 손님이 없다고 찌푸리며 만 원짜리 한장을 건네는 애인은 시 나부랭이나 끄적이는 내가 싫지는 않은 눈치다 나는 횟집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진 가게에서 막걸리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산다
내 동선은 일관성이 있다 그림처럼 일어나 그녀와 눈을 피하고, 그녀의 주방에서 걸리적거리지 않을 시간에 요기를 하고, 이층 창으로 내다보이는 바다를 멍청히 바라본다
부지런한 바다는 벌써 배를 몰고 나가고, 송송 땀 밴 그녀가 설친 잠을 잔다 파도만도 못한 힘없는 내 다리에서 근육이 빠져나가는지 자꾸 파르르 떹린다
-詩 전문 계간지『포엠포엠』2019년 가을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진은영 시인 / 스타바트 마테르 (0) | 2021.07.18 |
|---|---|
| 손택수 시인 / 제비에게 세를 주다 (0) | 2021.07.17 |
| 황금찬 시인 /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0) | 2021.07.17 |
| 김백겸 시인 / 제주 돌담길 외 1편 (0) | 2021.07.17 |
| 김경후 시인 / 항아리 (0) | 2021.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