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고희림 시인 / 지평선에서의 하룻밤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19.

고희림 시인 / 지평선에서의 하룻밤

 

 

사람들보다 소리가 더 가까운 외딴 풀밭이었다

지평선은 말이 없지만 경운기 소리로 꽉 차 있었다

냇물은 불었으나 갈 길을 막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나를 붙드는 것일까 이런 생각 뿐이었을 때

개울은 커튼처럼 흘러내리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배역처럼

물 아래 소리와 물 위 소리 사이에 너와 내가 누웠다

 

저 모든 지상의 것들을 위한 희생자 되버린

대지의 자궁 속에 뼈처럼 산처럼 쌓여 있는

길고 예리한 뿌리들처럼 나는 누웠고

너는 늙은 왕자의 달처럼 내 위에 올랐으니

우리는 한 몸 지평선이 되었다

 

어쩌랴 어쩌랴 지평선으로 만난 너와 나의 하루밤

내일 아침이면 그 실루엣의 배가

지평선 위로 불룩 솟아 오를 것이다

땅 밑에서 올라와 땅 위를 미친듯 돌며

깊고 뜨거운 그 많은 길을 견뎌온

늙은 왕자의 달을 잉태할 것이다

 

매양 헐겁게 흐르기 일쑤인 사랑이라지만

살면서 단막극같은 무대 위

우리는 몇 번이나 올랐다 내려올 수 있을까

 

 


 

고희림 시인

1960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 봉초, 정화여중, 효성여고, 숙명여대 정외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과. 2009년, 대구문학상 수상. 1999년,『 작가세계』로 등단. 2003년, 시집 『 평화의 속도』 펴냄. 현재, 남부도서관 맟 대구교대 평생교육원 시창작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