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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림 시인 / 지평선에서의 하룻밤
사람들보다 소리가 더 가까운 외딴 풀밭이었다 지평선은 말이 없지만 경운기 소리로 꽉 차 있었다 냇물은 불었으나 갈 길을 막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나를 붙드는 것일까 이런 생각 뿐이었을 때 개울은 커튼처럼 흘러내리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배역처럼 물 아래 소리와 물 위 소리 사이에 너와 내가 누웠다
저 모든 지상의 것들을 위한 희생자 되버린 대지의 자궁 속에 뼈처럼 산처럼 쌓여 있는 길고 예리한 뿌리들처럼 나는 누웠고 너는 늙은 왕자의 달처럼 내 위에 올랐으니 우리는 한 몸 지평선이 되었다
어쩌랴 어쩌랴 지평선으로 만난 너와 나의 하루밤 내일 아침이면 그 실루엣의 배가 지평선 위로 불룩 솟아 오를 것이다 땅 밑에서 올라와 땅 위를 미친듯 돌며 깊고 뜨거운 그 많은 길을 견뎌온 늙은 왕자의 달을 잉태할 것이다
매양 헐겁게 흐르기 일쑤인 사랑이라지만 살면서 단막극같은 무대 위 우리는 몇 번이나 올랐다 내려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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