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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희 시인 / 다시 산성마을에서
깃발처럼 꽃들은 나부끼는데 먼 길을 에돌아 오는 듯 딸랑딸랑 방울 소리만 바람결에 실려 오고
이곳에 비는 가장 먼저 흩뿌리고 눈발은 늦게까지 휘날렸지요 오래전 이 땅에서 누군가 머리를 조아렸지요 그걸 치욕이라 불렀지요 어둠이라 불렀지요
가위 같은 두 개의 다리가 줄곧 잘라낸 것은 무엇이었는지 질질 끌면서도 멈추지 않은 발자국 먼지는 구름 같이 피어올랐지요 멀리서 폭죽소리도 들렸지요 연인들은 잡은 손을 오래 풀지 않고 그 더운 가슴을 바람이 훑고 지나갔어요
꽃을 많이 피워내느라 산은 현기증을 앓았겠지요 얼굴을 스치며 꽃들은 겁 없이 뛰어내렸어요 발밑은 온통 연분홍빛, 치욕을 모르는 꽃들 짓이겨져 환한 어둠으로 돌아가는 동안 발이 자꾸 헛놓였어요
숱한 성벽들이 술렁였지만 성벽보다 오래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키는 꽃과 나무들, 장한 산성마을의 주민들 어둠의 힘으로 다시 환해질 테지요
그때 방울 소리 울리며 당신, 오실 건가요?
박설희 시인 / 만개한 유모차
마을회관 앞마당 신발보다 더 신발짝같이 할머니들이 벗어놓았다
쓸쓸한 직립을 기대고 일상의 무게를 덜어온 유모차 바퀴가 제멋대로 뒤틀려 있다 자그만 돌부리에도 삐걱삐걱 중심을 가눈다
떠난 것들의 흔적 가득한 텅 빈 둥지 바람이 뒤흔들다 간 낡고 바랜 의자에 햇볕이 늘어지게 쉬고 있다
지상엔 도닥도닥 잠재울 것투성이 끝없이 솟아나는 걱정거리 눈뜨기 전부터 달려드는 불안을 다 흩뜨려두고
연신 까르르 터져 나오는 웃음 볼그레한 노을 번진다 다들 모이니 올 한해도 그럭저럭 지낼 만한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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