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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설희 시인 / 다시 산성마을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7. 25.

박설희 시인 / 다시 산성마을에서

 

 

깃발처럼 꽃들은 나부끼는데

먼 길을 에돌아 오는 듯

딸랑딸랑 방울 소리만 바람결에 실려 오고

 

이곳에 비는 가장 먼저 흩뿌리고 눈발은 늦게까지 휘날렸지요

오래전 이 땅에서 누군가 머리를 조아렸지요

그걸 치욕이라 불렀지요

어둠이라 불렀지요

 

가위 같은 두 개의 다리가 줄곧 잘라낸 것은 무엇이었는지

질질 끌면서도 멈추지 않은 발자국

먼지는 구름 같이 피어올랐지요

멀리서 폭죽소리도 들렸지요

연인들은 잡은 손을 오래 풀지 않고

그 더운 가슴을 바람이 훑고 지나갔어요

 

꽃을 많이 피워내느라 산은 현기증을 앓았겠지요

얼굴을 스치며 꽃들은 겁 없이 뛰어내렸어요

발밑은 온통 연분홍빛, 치욕을 모르는 꽃들 짓이겨져

환한 어둠으로 돌아가는 동안

발이 자꾸 헛놓였어요

 

숱한 성벽들이 술렁였지만

성벽보다 오래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키는

꽃과 나무들, 장한 산성마을의 주민들

어둠의 힘으로 다시 환해질 테지요

 

그때 방울 소리 울리며 당신, 오실 건가요?

 

 


 

 

박설희 시인 / 만개한 유모차

 

 

마을회관 앞마당

신발보다 더 신발짝같이

할머니들이 벗어놓았다

 

쓸쓸한 직립을 기대고

일상의 무게를 덜어온 유모차

바퀴가 제멋대로 뒤틀려 있다

자그만 돌부리에도 삐걱삐걱 중심을 가눈다

 

떠난 것들의 흔적 가득한

텅 빈 둥지

바람이 뒤흔들다 간

낡고 바랜 의자에

햇볕이 늘어지게 쉬고 있다

 

지상엔 도닥도닥 잠재울 것투성이

끝없이 솟아나는 걱정거리

눈뜨기 전부터 달려드는 불안을

다 흩뜨려두고

 

연신 까르르 터져 나오는 웃음

볼그레한 노을 번진다

다들 모이니

올 한해도 그럭저럭 지낼 만한 것 같다고

 

 


 

박설희 시인

1964년 강원도 속초 출생. 성신여자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3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실천문학, 2008), 『꽃은 바퀴다』가 있음. 사)한국작가회의 회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