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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원 시인 / 무화과를 먹는 밤
죄에 물들고 싶은 밤 무화과를 먹는다
심장 같은 무화과 자궁 같은 무화과
발정 난 들고양이 집요하게 울어대는 여름 밤 달빛, 흰 허벅지
죄에 물들고 싶은 밤 물컹거리는 무화과를 먹는다
농익은 무화과의 찐득한 살 피 흘리는 살
강기원 시인 / 트레드밀
우리는 달린다 폐곡선 위 땀내 나는 수 많은 발바닥을 싣고 전진 없는 질주 머리 꼬리 없이 해와 달 바뀌도록 달리고 달려도 언제나 제자리 우리 안의 맹수처럼 쉭쉭거리며, 헐떡거리며 속도를 올릴수록 점점 뒤로 밀리는, 헛도는 피댓줄의 시간 서툰 조련사 같은 다리들 질기디 질긴 검은 등짝 번갈아 밟아 대도 우리는 한 걸음도 뗄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대들은 어떤가 궤도 이탈 없는 태양의 행성들 모래시계 속 붉은 모래 컨베이어벨트처럼 돌고 도는 핏줄들 둥글게 자기 꼬리 물고 있는 오우로보로스(Ouroboros)의 시간 그 사이 녹슨 관절들 삐걱거리는 소리 무척추의 척추에 올라타 연신 발 구르는 당신도 우리도 갈 곳이 없다
강기원 시인 / 처서
망초 꽃잎 속에 상제나비가 꽂혀 있다. 날개 달린 서표
당신이 서표를 건넸을 때 난 그것을 책에 꽂지 못하였다. 심장 속에 날개 접은 나비처럼 가만히 꽂혀 있는 서표. 나비인 줄 알았더니 차라리 단도다.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그것은 서슴없이 찔러댄다. 약속을 환기시키듯, 조용히 그러나 엄하게 꾸짖듯. 때로,
그것은 당신의 손바닥처럼 차가운 심장을 쓰다듬기도 하나 보다. 처서의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면 겹쳐지는 서표의 서늘한 촉감. 곧 제 리듬을 되찾은 심장을 놓아주고 난 그만 단풍처럼 나른해진다
가을의 부적 같은 상제나비 부적의 무늬는 망초 꽃술 마른 핏빛 부적의 위안과 경고
나비와 단도와 손바닥의 부적 사이에서 날들이 흘러간다. 저승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망초의 마음이 되어 나비를 바라본다. 망자의 발자국을 남겨놓고 쉬 떠나갈 상제나비의 마음은 외면한 채, 저도 아프리라, 아프리라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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